활동 똑같은 데 소속 바뀌었다고 지원자격 상실… 각종 규제에 대기업 성장 기업 2곳 불과
국내 중견기업들은 중소기업과 대기업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다. 박근혜 정부 들어 중견기업 육성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관련 지원이나 규제에 대한 기준은 모호하다. 지원은 끊기고 규제는 많아지는 상황을 접하게 되는 중견기업들은 자연스레 성장을 꺼리는 ‘피터팬 증후군’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
중견기업을 ‘잠재적 대기업’으로 바라보는 부정적인 사회적 시선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중견기업 수준이면 지원이나 육성책이 굳이 필요하겠느냐는 따가운 눈초리다. 중소기업과 달리, 대기업 규모로 성장하면 유예기간 없이 곧바로 지원을 끊는 정부 정책도 중견기업들의 속을 썩게 만든다.
◇대기업-중소‧중견기업 ‘이분법적 논리’… 융통성 없는 정부 정책 = 국내 종자업계 1위 기업인 농우바이오는 올해 매출 800억원대가 예상되는 중견기업이다. ‘국가대표 종자기업’으로 불리는 이 회사는 최근 때 아닌 속앓이를 하고 있다. 2년여에 걸친 노력으로 지난해 선정된 중소기업청의 ‘월드클래스300 프로젝트’의 자격을 박탈당할 위기에 처해서다.
배경은 이렇다. 창업주인 고(故) 고희선 회장이 사망하자 유족들은 1300억원에 달하는 상속세를 내지 못해 농우바이오를 농협에 매각했다. 어쩔 수 없는 매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농우바이오는 농협의 계열사가 됐다.
이에 월드클래스300을 운영하는 중소기업청과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은 농우바이오가 대기업 집단이 됐다며 지원 자격을 박탈하려고 나섰다. 월드클래스300은 ‘중견기업 성장촉진 및 경쟁력 강화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이하 중견기업 특별법)’에 근거해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에게는 지원이 불가하다.
지난해 첫 선정돼 본격적인 지원을 받으려던 농우바이오 측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농우바이오 정용동 대표는 “월드클래스300 지원을 받기 위해 농림부의 ‘골든씨드 프로젝트’ 지원도 포기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나섰다”며 “필요 자원도 뽑고 진행시켰던 사업도 있는데 최근 박탈 위기에 처하자 속이 쓰릴 수 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문제는 월드클래스300 뿐만 아니라 다른 정부 지원책들도 줄줄이 끊길 수 있다는 것이다. 중소기업의 경우, ‘중소기업법’에 따라 기업이 중소기업 범위에 벗어나도 1회에 한해 2~3년 지원 자격을 유예해주는 제도가 있다. 하지만 중견기업은 이 같은 유예 제도가 없다. 이 같이 중견기업에 대한 법적 근거가 모호한 탓에 정부에서도 뚜렷한 해결책을 찾기 힘든 상황이다.
이동기 한국중견기업학회장(서울대 경영학과 교수)은 “중견기업에 대한 지원 문제는 국민 정서상 정부로서도 부담이 많을 것”이라면서도 “지원을 받은 만큼 중견기업들이 국가 경쟁력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갑자기 지원을 끊는다면 그동안의 정부 지원이 무의미해진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런 대기업에 대한 부담 때문에 중견기업들이 계열사를 여러 개 만들거나 머물러 있으려는 상황들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라며 “중견기업 기준 등에 대한 기초연구가 필요한 이유”라고 덧붙였다.
◇규모 커지면 규제도 급증… 중견기업 성장 저해 = 중견기업이 성장하면 할수록 비례해 급증하는 정부 규제도 피터팬 증후군 확산의 이유 중 하나다. 대기업이 되면 기업의 발목을 잡는 규제가 많아져 중견기업들이 몸을 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22일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2년까지 5년간 중견기업 2505개사 중 대기업으로 성장한 기업은 2곳에 불과했다. 2011년 이후 30대 그룹에 신규 편입된 그룹도 전혀 없다. 2002년부터 2010년 사이에는 한 해를 빼곤 매년 적어도 1곳 이상이 30대 그룹에 진입한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또한 자산 5조원대 이상 기업의 증가도 정체에 빠졌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자산 5조원 이상 그룹은 12개 늘었지만, 2009년부터 5년간은 9개 증가에 그쳤고 올해는 오히려 1곳이 줄었다.
유가증권 시장의 상장가능회사들의 상장률도 감소하고 있다. 2010년 3.3%에서 2011년 2.2%로 떨어지더니 2012년과 2013년엔 각각 0.8%, 0.5%를 기록했다. 지난해의 경우에도 상장가능회사가 811개사나 됐지만 실제 상장회사는 4곳에 불과했다.
이는 기업 규모가 커질수록 급증하는 규제와 무관치 않다는 게 중견기업계의 지적이다. 전경련에 따르면 국내 기업 자산 규모별 규제 건수의 경우 자산 1000억원 이하 기업은 5건이지만, 2조원 미만은 21건, 5조원 미만은 44건으로 급증했다.
이승철 전경련 부회장은 “국내에선 기업규모가 커질수록 규제가 증가하는 ‘큰 돌이 정 맞는 현상’이 벌어진다”며 “기업규모에 따른 규제를 자산 기준액이 넘을 때마다 3~5년간 이전 수준으로 유예시켜주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지난 7월 법정단체화된 한국중견기업연합회도 중견기업에 대한 규제 개선에 적극 나서고 있다. 중견기업 성장을 저해하는 애로사항 ‘신발 속 돌맹이’ 해소를 위해 54건의 과제를 발굴, 지난 5월 국회와 정부 부처에 전달했다. 김홍국 중견련 규제개혁위원장은 “기업이 크고 작다는 이유만으로 규제와 지원이 엇갈리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