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손태선 컬처칼럼리스트
일본에 사이타마현 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 택시를 타고 논밭과 마을을 지나면 '무라카미 타카시' 의 회화 스튜디오가 나온다. 회화를 제작하는 스태프들은 아침 9시에 출근해서 무라카미의 이름을 걸고, 창의력을 발휘할 여지는 전혀 없는 단순한 반복 작업을 한다. 물론 회화의 아이디어는 무라카미 로부터 나왔고, 무라카미의 지휘 아래다. 이러한 스튜디오는 도쿄를 비롯해 뉴욕에도 있다.
그를 가장 널리 알리게 된 일, 또는 그로 인해 그것이 어떠한 가치를 가지게 된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루이비통 과의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다. '모노그램 캔버스' ( 네 잎의 꽃모양과 다이아몬드 모양 그리고 이니셜LV 모양이 들어간 디자인으로 루이비통의 상징적 패턴) 라는 제품 위에 무라카미 다카시가 디자인한 패턴이 들어간다. 3종의 디자인인데 추가된 무늬는, 흰색 또는 검정 바탕에 알록달록한 색체를 사용한 '멀티 컬러' 라인 인데 인기를 끌며 루이비통의 정식 라인이 되기도 했다.
무라카미는 반대로 이 패턴을 이용해 자신의 회화 작품에 삽입하여, 작품이 상품이 되고 상품이 작품이 되는 모호함(?)을 지닌 새로운 것을 탄생시켰다. 루이비통 가방 위에 무라카미의 작업이 들어 가면서 단순한 명품이 아닌 예술성을 겸비한 명품이 탄생한 것인지, 아니면 무라카미의 작품 위에 루이비통을 차용 하면서 단순한 예술 작품이 아닌 명품 예술품이 된 것인지.
이같은 행보는 우리 나라 작가 또한 예외가 아니다. '육심원' 같은 작가 또한 이와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겠다. 물론 거대 기업과 함께한 콜라보레이션은 아니지만, 원래 작가이고 자신의 작품을 상품 속에 무늬로 넣으면서 가방, 다이어리 등의 팬시 용품을 만들고 독립된 스토어를 오픈 함으로서 아트 상품이라는 입지를 굳히며 많은 작가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 뿐만 아니라 현대의 미술에서 쟝르의 경계 또한 모호해지고 있다. 동양화와 서양화를 구분하는 대신에 '회화' 라는 명칭으로 칭해지고, 사진 위에 페인팅 작업을 하거나, 페인팅한 것을 다시 사진을 찍어 작품화 하는 작품도 생겨 나면서 그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학문적 융합 이라는 거대 흐름을 타며 도달한 현상이다.
다른 학과의 이야기를 잠시 살펴 본다면, 컴퓨터의 힘을 깨달은 일부 인문 학자들은 컴퓨터를 이용한 업무의 장점을 생각해냈다. 인문 과학에서의 컴퓨터 연구(넘버 크런칭 number crunching 아주 많은 양의 데이터를 계산하는 것) 는 인문학과 컴퓨터 공학과의 융합을 꾀했다.
또한 미술은 정치적인 폭발력을 지닌다. 현재 열리고 있는 광주 비엔날레 에서 전시 예정 이었던 '홍성담' 작가의 작품은,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 한다는 이유로 작품이 일부 수정 되었으나 결국 전시되지는 못했다. 미술은 사회적 문제에 관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도록 하기도 하면서 정치와의 컨버젼스를 꾀했다고 할 수 있다.
미술이 과학을 보충한다. 정치를 논한다. 상품이 된다.
미술은 형식적인 기본 단위가 모두 해석이 가능한 기호는 아니다. 형식에 의해 작동되는 것은, 더욱 근본적인 의미 작용의 차원에 존재하는 것으로는 잘 보지 않는다.
어쨌든 현대 미술은 미술적 수단으로서 다른 제3의 어떤 것에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 가능성은 너무나 무한하다. 그래서 어설프면, 그 속에서 길을 잃을 수 있다.
각각의 것이 지닌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보완하면서 플러스 알파가 생기듯이 미술세계 에서도 그렇기를 기대한다. 미술이 상품이 되고 상품이 미술이 되는 합리적인 현상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