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년 92세를 일기로 8일 별세한 한국 섬유산업의 개척자 고(故)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이 1987년 중앙대학교 정경대학에서 한 강연의 일부다.
산업화 격변기를 거치며 우리나라 화학섬유산업의 최선두에서 의(衣)생활 혁명을 일으킨 그의 삶과 노력이 오롯이 드러난 대목이다.
‘이상은 높게, 눈은 아래로’를 늘 강조한 그는 목표를 향하는 등산식 경영과 아래를 살피는 공동체적 책임경영을 경영철학의 중심에 뒀다.
◇섬유산업 개척 경제발전 1세대= 이 명예회장은 1922년 4월 경북 영일에서 이원만 창업주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린 나이에 포항에 있는 일본인 상점의 점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다. 일본으로 건너오라는 부친의 편지를 받고 열다섯에 아사히공예사 경리를 맡아 아버지를 도왔다.
낮에는 일터에 있다가 밤에 흥국상업학교 야간부를 다녔고 조선인 교수의 권유로 시험을 준비해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합격한 뒤 배움의 길을 이을 수 있었다.
1944년 스물셋에 입영 1주일을 앞두고 신덕진 여사를 아내로 맞았다. 결혼 1주일 후 쯔루가(敦賀)의 중부 36연대에 조선학도특별지원병으로 입대해 식민지 청년으로서 울분과 고난을 경험해야 했다.
광복 후 귀국한 청년 이동찬은 한국전쟁 여파로 제대로 의복조차 입지 못하던 국민에게 따뜻한 옷을 입게 하리라는 신념 아래 경북기업이라는 직물공장을 세웠다. 이후 더 큰 꿈을 품고 상경해 단칸 사무실에 삼경물산 서울사무소와 후일 코오롱상사의 모태가 된 개명상사를 1954년에 세웠다. 한일 간 무역을 시작하며 나일론의 개화기를 앞당기게 된다.
그후 1957년 4월 이원만 선대회장과 함께 한국나이롱주식회사를 창립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나일론사(絲)를 생산한다. 섬유산업 역사에 획을 긋는 순간이었다. 한국나이롱은 1963년 일산 2.5톤 규모의 나일론사 공장 준공을 시작으로 10톤까지 설비를 증설했고 1968년 판매 전담회사로 코오롱상사를 설립하고 이 명예회장이 초대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이어 폴리에스터사 제조에도 착수해 1968년 한국폴리에스텔을 설립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화섬산업 중흥기를 타고 도약한 코오롱은 설립 20주년이 되던 1977년 그룹 회장제를 신설했고 이동찬 대표이사 사장이 그룹 회장으로 추대됐다. 이 선대회장을 도와 열다섯에 일을 시작한 이후 40년 만이었다.
격동의 1980년대에는 필름, 비디오테이프, 메디컬 등 관련 분야로 영역을 확대해 사업다각화에 성공했다. 또 1983년 한국섬유산업연합회장이 된 뒤 섬유인의 오랜 숙원이던 섬유백서를 펴냈다. 이후 1990년대에는 정보통신사업 진출을 추진했고 유통업으로도 외연을 넓혔다.
◇‘이상은 높게 눈은 아래로’ 한 평생 겸허해= 이동찬 명예회장의 경영철학이자 등산을 통해 터득한 이 교훈은 정상에 대한 목표를 세우고 겸허한 마음으로 한발 한발 오르다 보면 어느덧 정상에 서게 되고, 호연지기를 만끽하게 된다는 경험에서 배어나온 것이다.
그는 무리하게 스피드를 내거나 성급한 경영을 지양하고 그룹 전체가 서서히 산을 오르고 있다는 등산할 때의 마음가짐으로 그룹을 이끌어왔다. 특히 무리를 지어 등산을 할 때 뒤에서 따라 갈 때는 힘들고 짜증스럽지만 앞장서서 산을 오를 때는 뒷사람을 인도한다는 사명감과 보람으로 고된 줄 모른다는 교훈을 기업경영과 결부시켜 회사 임직원들에게 자주 들려줬다.
청렴결백한 기업인으로서 이 명예회장이 1947년부터 50년이 넘게 신어온 슬리퍼를 비서실에서 새 것으로 바꿨다가 야단을 맞고 쓰레기통에서 다시 찾아낸 에피소드도 있다. 10년 넘게 입어온 맨스타트렌치 코트와 등산이나 낚시 갈 때에는 9인승 승합차를 이용한 것도 유명한 일화다.
◇14년간 경총 회장 재임, 노사 상생 기여= 이 명예회장은 1980년대 누구도 맡기를 꺼려하던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자리를 14년간 맡으면서 바람직한 노사관계 진입을 위해 노력했다. 대내외적인 어려운 환경의 변화를 극복하고 노사 양측에 서서 각각의 입장을 이해하고 반영하기 위해 몸소 뛴 결과 이 명예회장은 취임 초기의 포부대로 산업평화 정착에 많은 기여를 했다.
경총회장으로서 이 명예회장은 지난 1989년 경제 5단체가 참여하는 경제단체협의회 창설을 주도해 한국 경제의 최대 걸림돌이던 노사문제를 풀어가는 데 주역으로 활동했다. 1990년에는 노사와 공익대표가 참석하는 국민경제사회협의회를 발족시켰다. 기업주와 근로자가 첨예하게 대립했던 1993년에는 경총회장으로서 한국노총과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냄으로써 한국 노사관계의 새 장을 열었다.
노사분규가 심했던 1993년 이 명예회장은 당시의 상황을 경영자, 근로자, 정부 3자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판단하고 기업주와 근로자가 상호 대등한 위치에서 대화와 타협으로 분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한국노총과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냄으로써 한국 노사관계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4년에는 산업평화 선언을 통해 노사협력의 시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신은 후대 이웅열 현 코오롱그룹 회장의 경영방침에도 이어져 노사갈등이 극심했던 화섬업계에서 2007년 항구적 무분규를 골자로 하는 노사상생동행을 선언키도 했다.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숨은 조력자= 이 명예회장은 한국 마라톤의 열성적인 후원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비인기종목이었던 마라톤과 육상의 중흥을 위해 1985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전국 남녀고교 구간마라톤대회’를 주최해 마라톤 선수의 저변확대와 인재의 조기 발굴 육성을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코오롱마라톤 팀을 창단해 우수한 선수들을 육성하고 있다.
또 한국마라톤 기록 갱신을 위한 활력소의 일환으로 기록 갱신자에 대해 연구장려비를 지급한다는 일련의 내용을 발표해 마라톤 선수들을 격려했다. ‘손기정 선수 이후 맥이 끊겼던 국내 마라톤 선수의 올림픽 금메달 획득’이라는 이동찬 회장의 바람은 청년기 마라톤 기록갱신으로 1억원의 연구장려비를 받은 황영조 선수의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제패를 통해 현실화되기도 했다.
아울러 이 명예회장은 2002 한·일 월드컵 초대 조직위원장을 역임하며 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와 축구 전용경기장 확충 등에 많은 기여를 했다.
◇‘이웃과 더불어 번영하는 것이 기업인 소명’= 이 명예회장은 기업가로서뿐만 아니라 공인이자 더불어 사는 이웃이 되기 위해 사회공헌활동도 적극적으로 해왔다. ‘더불어 사는 우리사회’ 만들기에 노력해온 이 명예회장은 기업경영 활동을 마감한 후 코오롱그룹 오운문화재단의 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살맛나는 세상’ 캠페인 사업을 하는 등 사회봉사 활동에 힘썼다.
“어려운 이웃들에게 용기와 자활의 기회가 되고, 지역 주민들에게도 편안한 쉼터가 되기를 바란다”며 1992년에는 강북구 길음동에 12억원 상당의 길음사회복지관을, 2003년에도 사회복지법인 운가자비원에 27억원 상당의 수유종합사회복지관을 건립해 기증했다. 1995년에는 충북 괴산에 청소년 수련마을인 보람원을 개원함으로써 한국 청소년 교육의 새장을 열었다. 또 살맛나는 세상 캠페인의 일환으로 사회의 선행·미담 사례를 발굴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그의 호를 딴 ‘우정선행상(牛汀善行賞)’을 제정해 2001년부터 매년 4월 시상식을 통해 선행을 격려해 왔다.
◇“기업의 부실은 사회에 대한 배신·배임”= 이 명예회장은 수많은 강연에서 자신의 경영철학을 전파하는데 노력했다. 그의 주요 어록이다.
‘남이 장에 간다고 거름지고 장에 간다’는 속담처럼 어떤 업종이 호황을 이룬다고 해서 무턱대고 뛰어드는 방식은 지양돼야 한다. 자신이 가장 잘하고 있는 분야에서 조금씩 발전을 시도하고 변신을 지속해 나가는 것이 성공적으로 기업을 이끄는 길이다.(1986년 10월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초청 강연)
기업은 나 개인의 것이 아니다. 종업원 모두의 사회 생활의 터전이며 원천이므로 사회의 공기업이다. 그렇기에 기업의 부실은 사회에 대한 배신이며 배임이다.(1981년 10월 KBS ‘나의 경영철학’ 방송 강연)
기업은 국가 경제 발전의 주요한 주체이며 사회 발전의 원천이고 직장인의 생활터전이다. 따라서 후손에게 풍요로운 정신적 물질적 유산을 남겨 놓아야 한다는 것은 기업가의 사명이다.(1987년 4월 중앙대학교 정경대학 강연)
기업가는 우선 종업원과 그들의 가족을 생각해야 되고 일반 소비대중도 생각해야 되며 나아가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기업의 사회성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기업의 사회봉사 정신이야말로 오늘날 한국적 사회풍토에서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기업가의 윤리가 아닌가 생각한다.(1982년 자서전 ‘이상은 높게, 눈은 아래로’ 中)
절대 무리하지 않고 분수에 맞는 경영을 펴왔으며 이상은 높게 갖되 겸허한 자세로 이를 정복해 나가는 ‘등산식 경영’과 목표를 향해 쉼없이 일정한 페이스를 유지해 나가는 ‘마라톤식 경영’으로 코오롱을 이끌어 왔다.(1991년 9월 ‘리쿠르트’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