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끝이나 시작에선 각 분야에서 활약했던, 활약이 기대되는 사람들을 꼽은 각종 ‘순위’들이 나온다. 다른 분야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특히 경제학 분야에선 이 순위들에 ‘없어도 너무 없는’ 존재들을 확인하게 된다. 바로 여성이다.
어느 조직에서나 여성은 마치 `산소`인듯(?) 윗 자리로 갈수록 희박해지는게 사실이긴 하지만 경제학자 가운데에서도 찾아보기 너무 어렵다.
얼마 전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2014년 기준으로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 순위(Ranking of influential economists)를 발표했다.
1위는 조너선 그루버 매사추세츠주공과대학(MIT) 교수였다. 전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인 벤 버냉키(5위)와 앨런 그린스펀(9위)이 순위권에 들었고,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3위), 로버트 쉴러 예일대 교수(8위) 역시 이름을 올렸다. 저서 <21세기 자본>으로 `경제학계의 록스타`가 됐던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도 13위에 올랐다.
이코노미스트는 25명의 영향력있는 경제학자를 선정하기 위해 우선 미국의 경제논문 정보 사이트 레펙(RePEc)을 통해 박사과정 학생들이 많은 영감을 받고 있는 경제학자 순위를 참고했고 여기에 언론 노출과 블로그, 소셜 미디어 인용 빈도 등을 감안해 순위를 매겼다.
그루버 교수의 경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밀고나간 건강보험 개혁 자문을 맡아 언론에 많이 노출된 것이 가중(加重)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이렇게 따지자면 벤 버냉키, 앨런 그린스펀 같은 과거 연준 의장들보다 재닛 옐런 현 의장이 꼽혔어야 하지 않을까. 이코노미스트는 이와 관련해 "현직 중앙은행 총재는 포함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같은 이유로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와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BOJ) 총재 역시 선정되지 않았다.
여성 경제학자로서도, 통화정책의 수장으로서도 훌륭한 옐런 의장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라도 굳이 현직 의장을 제외하고 순위를 매길 필요는 없었지 않을까.
적잖은 이들이 비슷한 의문을 제기했다.
분석 및 예측 업체 파이브서티에잇(Five Thirty Eight)의 경제분야 수석 라이터 벤 캐셀먼은 캐셀먼은 트위터를 통해 옐런 현 연준 의장이 빠져있다는 점은 석연치 않다면서 "지금까지 최고의 농구선수를 뽑을 때 조던이 상위에 있지 않다면 아마도 방법론을 재고해봐야 하지 않을까"라고 지적했다. 그는 파이브서티에잇에도 관련 글을 올리고 칼 세이건의 유명한 말 "놀라운 주장은 특별한 증거를 요구한다(Extraordinary claims require extraordinary evidence)"를 인용하기도 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의 조쉬 줌브런, 비즈니스인사이더(BI)의 기자 마일즈 업랜드 역시 같은 문제를 지적해 눈길을 끈다.
경제학계는 여성의 불모지나 다름 없었다.
미국경제학회(AEA)에 따르면 지난 2013년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 가운데 여성이 전체의 35%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정교수로 재직하는 사람은 12%에 불과하다.(관련 링크: https://www.aeaweb.org/committees/cswep/annual_reports/2013_CSWEP_Annual_Report.pdf)
그래도 다양성(Diversity)을 존중할 줄 아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1기 경제팀에 여성 두 명을 임명했을 때 경제학계에도 출중한 여성들이 있음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크리스티나 로머 UC 버클리대 경제학과 교수는 학계에서도 낭중지추였지만 대통령 경제자문위원회(CEA) 의장에 오르면서 남편과 함께 경제학자로 쌓아온 이력이 더 빛을 발했다.
노벨상 가운데에서도 경제학상은 특히 남성 독점이었다. 여성에게 최초로 돌아간 건 2009년. 엘리너 오스트롬 미국 인디애나대 교수가 받았다. 하지만 오스트롬 교수가 인문대 정치학과와 행정환경대학원(School of Public & Environmental Affairs) 교수였고, 박사 학위도 정치학으로 받았다는 점에서 정통성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학계를 벗어나도 여전히 여성은 상징적인 몇몇을 빼고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 상징적인 존재들도 반짝하고 없어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에서 여성 대통령이 탄생하자 민간 기업들은 여성 임원들을 조금 더 배출하는 모습을 보였다. 보수적이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은행권에서 여성 은행장도 처음으로 나왔다. 지난해 말에는 115년만에 우리은행에서 첫 여성 부행장이 탄생했다. 그런데 잠깐의 `보여주기`가 끝나자 다시 퇴행하고 있다. 하나은행과 외환은행이 통합되는 과정에서 여성 임원은 오히려 줄었다. 여성 전무가 2명 있던 하나은행에선 그 수가 1명으로 줄었고, 외환은행은 이번 인사에서 여성 임원을 한 명도 발탁하지 않았다.
실력이 되지 않는데 여성이라는 이유로 강제 할당해 임원을 맡기는 건 모순이자 남성에 대한 역차별일 수 있다. 그러나 각 조직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선 남녀 인재를 두루 활용하는 능력, 이른바 젠더 인텔리전스(gender intelligence)를 진정하게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능력있는 여성을 발굴해 권한과 책임을 주는, 다시 말해 리더나 관리자 자리에 오르도록 하는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후배 여성들에게 롤모델과 버팀목이 됨으로써 영향력을 발휘하는 낙수효과를 분명히 보여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