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법당국이 스위스와 공조해 비리의 온상으로 지목돼온 국제축구연맹(FIFA)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하면서 111년 역사의 FIFA가 최대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미국 이외의 국가에선 ‘자국 시민도 아닌데 무슨 권한으로 미국이 수사를 주도해 관련자들을 기소까지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반발 내지 의문이 증폭되고 있다.
지난 27일(현지시간) 제프리 웹 부회장과 잭 워너 전 부회장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축구계 거물들이 FIFA 차기 회장 선거를 이틀 앞두고 투숙 중이던 스위스의 한 호텔에서 긴급 체포됐다. 이들은 지난 1991년부터 최근까지 무려 24년 동안 스포츠 마케팅 업체들로부터 월드컵 중계권 수주 대가 등으로 지금까지 드러난 금액만 1억5000만 달러(약 1657억원)의 뇌물과 리베이트를 받았다고 미국 법무부는 밝혔다.
로레타 린치 미 법무장관은 “체포 타이밍은 FIFA 회장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판에 제시할만한 증거가 충분히 확보됐기 때문에 결정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 사법당국은 현지 사법당국의 협력을 얻어 국외에서 용의자를 체포할 수 있다.
이번 사건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유치한 2010년 월드컵에서도 부정이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등 축구 역사상 전례없는 스캔들로 발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FIFA는 사건 발생 하루가 지난 28일, 예정대로 총회를 열었다. 제프 블래터 회장은 “사건이 무거운 그림자를 떨어 뜨렸다. (부패는)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안된다”며 신뢰 회복에 적극 임할 것이란 입장을 강조했다.
이번 사건이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미국의 주도로 국제적인 차원의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당국은 기소된 FIFA 간부들이 미국에서 비리를 계획하고 미국의 은행 시스템을 이용했다는 점을, 미국의 법률 적용 가능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뇌물의 일부는 미국 대형은행인 JP모건체이스와 씨티은행 뉴욕 지점의 계좌로 송금된 것으로 알려졌다.
미 법무부는 “미국에서 발생한 범죄”라고 판단해 국외 사법 당국의 협력을 얻어 수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공무원이 아닌 FIFA 부회장 등을 입건할 수 있었던 것도 미국 법이 민간인끼리의 뇌물 수수도 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미 연방수사국(FBI)의 제임스 코미 국장은 기자 회견에서 “만약 미국 내에서 부정 모의를 하고, 미국의 금융 시스템을 이용해 부정한 자금을 전달하거나 하면 미 당국은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언론들에 따르면 FIFA 간부들은 스포츠 관련 업체 등에서 부정한 현금을 받을 때 스위스와 파라과이의 은행 계좌 또는 제3자를 통하는 등의 수법으로 발각을 미연에 방지했다. 일부는 컨설팅 수수료 등의 허위 명목으로 입금하라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형사 사건에서는 일반적으로 용의자를 함께 체포해 증거 인멸과 말 맞춤을 막을 필요가 있다. 간부들이 일제히 모이는 FIFA 총회는 미국과 협력 관계에 있는 스위스 사법 당국이 공조해 체포에 나설 최적의 타이밍이었던 셈이다.
미국은 이번 FIFA 뇌물 스캔들 수사 외에도 사기, 탈세, 불법 자금세탁 등 금융범죄와 관련해 외국은행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고 있다. 기축통화인 달러화를 앞세워 세계 경찰을 자처하며 사법권을 전세계로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미국은 2010년 5월 다우지수가 몇 분 만에 1000달러 가량 폭락한 이른바 ‘플래시 크래시(Flash Crash·갑작스러운 붕괴)’와 다른 금융시장을 조작한 혐의로 영국 런던에 본거지를 둔 트레이더 나빈더 싱 사라오를 지난달에 기소했다.
브루클린의 뉴욕 동부지구 연방지검은 관할 구역 내에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이 있기 때문에 기소 권한이 있다. 용의자가 이 공항에 착륙한 비행기에서 내리면 상황에 따라 그 범죄와 관련이 있는 미국의 다른 곳이 아닌 브루클린에서 기소·재판을 요구할 수 있다.
뉴욕 동부지구 연방지검은 이 권한을 사용해 미국과는 관련이 없는 사건에서도 여러 건의 기소를 처리했다. 그 중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측근 중 한 명의 돈세탁 사건도 있었고, 영국 대형은행인 HSBC홀딩스의 합의금으로 발전한 이 은행직원의 대규모 돈세탁 사건 등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