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형 전 현대경제연구원장
“장무(章武) 3년(AD 223) 봄, 유비가 영안(永安)에서 병이 위독해지자 성도(成都)에 있는 제갈량을 불러 후사를 맡기는 유언을 하길, ‘그대의 재주는 조비(曹丕: 조조의 아들, 당시 위(魏) 문제(文帝))의 10배를 넘으니, 필히 나라를 안정시키고 종국에는 천하를 통일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나의 아들인 유선(劉禪)이 그대가 보필할 만하면 보필하되, 그렇지 못하다 판단되면 차라리 그대가 군주의 자리를 차지하라.’ 이 말을 들은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고하길, ‘신(臣)이 있는 힘을 다해 충성을 다 바쳐서 오직 죽음으로 주군의 후사가 이어나가도록 지키겠나이다!’ 그러자 유비는 유선을 불러 조칙(詔勅: 황제의 명령을 공식 문서화한 것)을 내리길, ‘내가 죽고 난 후 매사를 승상과 상의하여 처리하되, 승상을 아버지처럼 모시도록 하라’고 명령하였다.”
고대 삼국시대가 절대군주제(絶對君主制)였음을 감안하면 군주가 신하더러 차라리 차기 군주의 자리를 이으라고 권하는 장면은 이채롭다 못해 가슴 뭉클한 감동을 안겨준다. 요즘으로 치자면, 대기업을 창업한 오너 1세 회장님이 자신의 아들이 능력이 모자라자 자신을 평생토록 보필해온 능력 있는 전문경영인에게 자리를 물려줄까 말까를 고민하는 장면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경우 대부분의 재벌기업들이 3세 경영의 시대로 들어가고, 일부에서는 4세가 경영수업에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재벌가문 출신 중 기업경영보다 예술이나 문학 등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의 경우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미국의 경우 건국 초기 엄청난 부를 일군 오너 1세들이 등장한다. 석유재벌 존 록펠러,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 자동차 재벌 헨리 포드 등 무수한 창업 1세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 중 지금까지도 그 후손들이 경영 일선에 나서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가장 최근의 예로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기업인 애플을 일군 스티브 잡스까지, 그들이 일군 회사는 남아 있지만 모두 전문경영인에게로 경영권이 넘어가 있다.
왜 그러한가? 냉정하게 판단해 보자면, 자신의 후손이 자신만큼 능력이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전문경영인이 경영을 안정적으로 해 회사 가치를 높이는 편이 가문의 재산을 지킨다는 점에서도 백번 타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왜 세습경영이 계속 이어지는가? 결론적으로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처럼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넘기는 통로가 사실상 막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재벌가문들은 재단(財團)을 만들어 그들의 소유 지분을 기증의 형태로 출연했다. 따라서 재벌가문은 이들 재단을 소유하지만, 비영리법인인 관계로 회사의 경영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고, 본연의 목적인 공익사업에 몰두하며 국가는 이들 재단에 상속세를 면제, 재벌가문의 영예로운 퇴장 및 전문경영인 시대를 유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이런 재단 설립은 물론 가능하다. 그러나 이들 재단에 자신이 보유한 지분을 출연(出捐)할 경우, 5% 넘는 지분은 출연하지 못하게 한도를 설정해 놓고 있다. 왜 그러한가? 1990년대 재벌들의 경우 이러한 재단의 출연을 통해 상속세를 면제받는 것은 물론, 원칙적으로 회사 경영에 관여해서는 안 되는 룰을 어기고 사실상 재단을 통해 그룹의 경영을 계속해 온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법은 전형적인 과잉 입법의 예라 할 수 있다. 재단이 회사 경영에 실질적으로 관여하는지를 감시 감독하면 될 것을, 아예 재단의 출연 자체를 막아버리는 것은 전문경영인 시대의 출현을 봉쇄하는 악법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