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아가야!” 그녀의 손 핏줄마저 떨리고 있었다. 자살한 딸에 대한 엄마의 절망과 회한이 오롯이 전달된다.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친다. 한참을 먹먹하게 있다. 두 시간 동안 단 한 번의 장면 전환 없이 대사와 연기로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16일 오후 3시 서울 대학로 한 소극장. 73세의 노배우가 무대 위에서 쏟아낸 열정은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에게 감동으로 다가간다. 관록이 아니다. 연륜도 아니다. 매번 무대에 설 때마다 무서워 준비하고 또 준비한단다. 연습하고 또 연습한다고도 했다. 공부하고 또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연극‘잘 자요, 엄마’의 나문희다.
‘우리 시대 최고의 배우’라는 수식어의 명성에 갇히지 않고 ‘작은 배역은 있어도 작은 배우는 없다’며 캐릭터 비중에 상관없이 연기에 몰두하고 연기경력 54년에도 “연기가 늘었다”는 말을 듣기 위해 오늘도 치열하게 연습하고 공부하는 배우가 나문희다.
온몸을 감전시키는 그녀의 연기를 보며 오랜만에 진짜 어른은 저런 모습이구나라는 느낌을 가진다. 동시에 “봐주지 마라.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 너희가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까딱하면 모두 저 꼴 되니 봐주면 안 된다”라는 지난해 미디어학자 이진순 박사와의 인터뷰에서 젊은이들에게 당부하던 효암학원 채현국 이사장의 일갈이 소환된다. ‘어떤 사람은 25세에 죽어버리면서 장례식은 75세에 치른다’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언급과 함께.
어린 시절 생각했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지혜와 연륜이 쌓이는 것이라고. 그래서 노인은 현자(賢者)라고. 하지만 정반대의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을 나이 들며 체감했다. 요즘 젊은이들 역시 어른의 부재를 절감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불의에 눈감고 부패, 비리조차도 상황을 들먹이며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어른들을 정치판에서 수없이 목격한다. 제자의 논문을 표절하고 연구비까지 착복했으면서도 관행이라고 우기는 노교수들을 학교에서 수없이 만난다. 온갖 불법과 편법으로 황금성을 쌓고도 직원들을 사지로 내몰면서도 국가 경제를 위하는 일이라고 궤변을 늘어놓는 재벌들을 본다. 자기만의 가치관과 비합리적 독단을 진실이라고 설파하고 나이를 권위의 등가물로 강조하며 젊은이들을 누르는 어른들과 함께 생활한다.
한때 개인소득세 납부액 2위의 거부였지만 운영하던 탄광 재산을 직원들에게 모두 나눠주고 유신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던 사람들에 은신처를 제공하고 민주화단체에 거금을 기부 한 사람. 학원 이사장이지만 대부분 작업복 차림으로 학교 정원일 등을 하고 있어 학생들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여든이라는 나이에도 지하철에선 청년들의 자리 양보를 만류하는 사람이 채현국 이사장이다.
“좀 덜 치사하고, 덜 비겁하고, 정말 남 기죽이거나 남 깔아뭉개는 짓 안 하고, 남 해코지 안 하고 …. 그것만 하고 살아도 인생은 살 만하지.”“‘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이라고 말한 것은 생각해야 할 걸 생각 안 했고, 배워야 할 걸 안 배웠고, 습득해야 할 걸 습득 안 했고, 남한테 해줘야 할 일 안 했기 때문이지. 저 사람들은. 매 순간 안 했어. 젊은 날에, 열 살 때, 스무 살 때, 서른 살 때 늘 해야 할 걸 안 했어. 남 배려해야 할 능력이 생겼을 때 남 배려 안 했어.”(김주완 저‘풍운아 채현국’)“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그걸 깨닫도록 노력 안 한 사람들, 자기 껍데기부터 못 깨는 사람은 또 그 늙은이 돼, 그 말입니다. 저 사람들 욕할 끼 아니고 저 사람들이 저 꼴밖에 될 수 없었던 걸 바로 너희 자리에서 너희가 생각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거지.”“늙으면 지혜로워진다는 건 거짓말입니다. 농경 시대의 꿈 같은 소리입니다. 늙으면 뻔뻔해집니다.”(채현국 구술 정운현 기록, ‘쓴맛이 사는 맛’)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힘든 이에게 내어주고 “봐주지 마라.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 너희가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고 일갈하는 채현국 이사장을 보며 수많은 젊은이가 어른 되는 것을 긍정했다. 그리고 명성과 권위, 연륜에 안주하지 않고 오늘 최선을 다하는 나문희를 접하며 “나이를 먹어도 배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해준 나문희 선생님을 존경합니다”라는 황정민 같은 후배 연기자들이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