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에 친구랑 자전거로 국토 종주했어. 맘도 다잡을 겸 자소서에 한 줄 쓸 겸 겸사겸사 해서...근데 말이 국토종주이지. 정말 엉덩이 아파서 죽을 뻔했어. 나중에는 엉덩이에 생리대 붙이고 완주했다니까. 이런 것도 자소서에 써도 되려나?"
28세 취업준비생 A씨. 요즘 취업이 '바늘구멍'이라는 문과 출신. 졸업한 지 이제 2년 차. 학점은 4.5점 만점에 3.7중반대.
나름 대학 4년 동안 착실히 학점도 챙기고, 힘들게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해외 어학연수도 다녀왔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대기업 인턴도 했습니다. 비록 정직원 전환 인턴은 아니었지만, 훗날 경쟁력이 될 것이라 믿었죠. 하지만 졸업 후 취업 스터디에 들어와 다른 취준생(취업준비생)들과 비교해보니 A씨가 이제까지 쌓아 놓은 것은 경쟁력이 아니라 '기본'이었다는군요.
A씨는 올해엔 무조건 취준생 신분에서 탈출하리라 다짐했지만, 상반기 '서류 광탈'. 마음을 되잡고 하반기 채용을 노려 토익 점수도 900대 중반으로 올려놓고 한자 자격증도 땄는데요. 그야말로 '멘붕'입니다. 기업들이 학점이나 학벌, 외국어 점수나 자격증 등 소위 '탈(脫) 스펙'을 외치며 하반기 채용 방식을 확 바꾸는 바람에 새로운 채용 프로세스에 적응해야 할 처지에 놓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삼성그룹을 비롯해 LG, 현대차 등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학점과 영어점수, 스펙, 어학연수, 인턴 경험 등의 스펙보다는 인성을 중시하겠다며 자소서 비중을 높였는데요. 심지어 SK는 외모로 선입견을 만들지 않겠다며 입사지원서에 사진란을 뺐고요. 현대차는 올해 면접에서 정장을 입지 말 것을 권고했습니다.
취준생 입장에서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나' 가늠이 안 된다는 반응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기업들이 정말 스펙을 보지 않는 것이 맞나 알 수 없는 노릇이고요. 기업들이 '탈 스펙' '인성'을 외치면서 자소서 서술 항목이 더욱 까다로워지고 요구하는 분량도 많아지는 추세이기 때문이죠.
자소서 항목에는 철학적 질문이 있는 가하면 전문성과 통찰력을 요구하는 항목도 있습니다. 예컨대 "급변하는 금융환경에서 해당 은행이 맞이한 위기와 기회는 무엇인지 대응방안에 대하여 작성하라", "당사 브랜드 중 한 가지를 택해 인지도 제고 방안 아이디어와 실현방안을 기술하라" 등의 항목은 현장 경험이 없는 취준생에게 추상적인 답을 하거나 거짓말을 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죠. 상황이 이렇다보니 취준생 사이에서는 자소서 항목의 난이도가 높은 은행을 두고 은행 이름과 '신춘문예'를 결합해 '신한문예' '우리문예'로 부르기도 할 정도입니다.
평범한 대학생활을 한 취준생 대부분은 다른 사람과 차별되는 '쓸거리'를 찾기 어렵죠. 이 때문에 대학입시 논술처럼 유료 컨설팅이나 첨삭지도를 받는 사교육이 생겨나고 있고요. A씨처럼 오로지 자소서 항목을 채우기 위해 외국 단기봉사나 이색 체험, 단기창업에 뛰어드는 학생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스펙도 보지 않는 상황에서 '일단 지원하고 보자'하는 사람들을 걸러내기 위해서는 자소서 항목이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는 입장인데요. 스펙중시 문화를 없애고 취준생의 부담을 줄여준다는 취지가 또 다른 스펙 쌓기로 이어지는 '웃픈' 현실이 안타깝네요.
[e기자의 그런데] '사람보다 더 잘하는' 섹스로봇 시대가 온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