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둥이 여성이 겪은 격동의 현대사’ ① 역사와 함께한 70년, 그들의 삶
지금까지 여성들의 이야기는 역사 서술에서 주변부로 밀리거나 역사화되지 않았다. 우리가 그동안 배우고 읽은 역사책 속에 선덕여왕과 신사임당 외에는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다. 같은 시대, 같은 사건을 겪더라도 여성의 경험은 남성의 경험과 다르며 이러한 대항적 역사 서술이 필요하다.
잊혀진 여성의 역사를 찾기 위해서는 다양한 자료수집 방법을 활용해야 하며 그 중 구술은 생생하고 귀한 자료로 각광받고 있다. 한 개인의 지나온 삶을 통해 사라져가는 전통의 흔적을 찾을 수도 있고 당시의 사회상과 가치관의 단면을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해방둥이 여성의 구술을 통해 본 한국현대사의 단면은 이렇게 정리된다.
◇교육= 1949년 초등교육이 의무교육으로 제정되었다. 그러나 그 혜택이 딸에게까지 주어지지는 않았다. 1955년 당시 여성의 미취학률이 71.8%였던 것이 그 사실을 잘 말해준다. 대부분의 생계수단이 농업이었으며 형제자매의 수가 많았던 해방둥이 여성들은 주로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시집가기 전까지 집안일과 동생이나 조카 돌보는 일에 매여 있었다. 공부 못한 한은 매우 깊어 노년이 된 지금도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것이 자식에 대한 과도한 교육열로 표출되기도 했다. 구술자 중에는 고등학교와 대학에 진학해 교사, 배우, 기자 등 전문직을 가진 경우도 몇 있었다. 경제적 여유가 가장 큰 요인이긴 하나 당시에도 이 경우 어머니의 교육열이 남달랐던 것이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전쟁으로 인한 남성 부재의 상황에서 경제적 긴박감을 느낀 여성들의 변화 중 하나는 여자도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영향으로 구술자 중에는 꼭 돈을 벌 목적이 아니더라도 결혼 전에 양재학원에 다니거나 미싱자수를 배운 경우도 있었고 그 기술로 자그마한 사업을 하여 자녀교육과 생계를 해결하기도 했다.
◇사회생활과 경제활동= 한국전쟁으로 인한 남성들의 부재로 여성들의 사회·경제 활동이 증가하자 우리 사회는 이 여성들을 다시 가정으로 안착시키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했다. 1953년 간통쌍벌죄가 제정된 상황에서도 자유부인 논란 등을 통해 여성의 자유는 곧 방종이라는 인식이 확산됐다. 학교에서도 교육 내용에 차별을 두어 여학교에서는 생활관과 가사실습 등 현모양처 교육을 정책적으로 시행했고 어머니날을 제정해 모성 이데올로기를 강조했다. 그 결과 해방둥이 여성들은 “여자가 돈을 벌면 큰 일 나는 줄 알았다”거나, 대학에 진학해도 가사과를 선호하였고 직장생활을 했어도 결혼과 동시에 퇴직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런 장치들로 역동적인 한국 여성들을 가정에만 붙잡아두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해방둥이 여성들은 가부장제를 유지하는 보수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경제력이 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알뜰히 살림만 했다”는 경우에도 실은 경제활동으로 간주되지 않았을 뿐 강한 생활력과 부지런함으로 생계나 능력 개발을 위해 다양한 생산적 활동을 계속했다. 좌절당한 사회참여의 기회는 새마을운동 부녀회 활동이나 적극적인 교회 봉사활동, 1980년대부터 시작된 부동산 붐을 탄 재테크 활동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결혼생활= 전근대 시대에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부모가 정해준 짝과 혼례를 치루었다면, 해방 이후 서구문물이 유입되고 전쟁으로 사회변동이 심했던 시기에는 결혼 적령기나 결혼의 양태가 이전과 많이 달라지게 된다. 구술자 수가 적어 표본집계를 낼 수는 없지만 이번 구술자들의 결혼 연령은 20대 전반에 고르게 분포돼 있었다. 중매결혼이 대세여서 선 본 당일 정혼한 경우도 있었지만 연애결혼을 한 경우도 있었다. 산업화 시대에 접어든 때라 남편들의 직업은 부모세대와 다르게 다양해졌다.
월남전 참전용사와 결혼하여 고엽제의 피해로 평생을 시달리는 남편을 수발하고 생계를 책임지느라 고달픈 삶을 살아온 여성의 이야기, 전기 기술자 남편이 경제개발계획으로 산업단지가 설립되는 곳마다 찾아다니느라 계속 이전 다니는 남편 밥을 해주라는 시댁의 명으로 아이를 맡겨놓고 남편과 단둘이 지내면서 느낀 소소한 행복, 중동 건설 붐으로 남편이 사우디에 가 있는 동안 남편과 시댁의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외출 한 번 못하고 몸가짐을 조심하면서 남편이 송금한 돈을 모두 시댁으로 보냈다는 여성의 이야기는 또다른 역사의 뒤안길을 보게 해준다. 주거환경과 생활양식에서도 가전제품과 아파트라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가족계획= 1960~70년대 중요한 국가정책 중 하나는 가족계획이었다. 극히 개인적인 일인 출산의 자율권을 국가가 주도하는 것이었다.‘하늘이 내린 복’으로 여겨졌던 다자녀를‘창피한 일’로 인식하게 해 인구를 조절, 경제성장을 도모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사업은 유래없는 성공을 거뒀고 지금은 지구상에서 가장 아이를 적게 낳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가족계획의 이 같은 성과 뒤에는 수많은 여성들의 보이지 않는 아픔이 내재되어 있지만 역사에서는 서술되지 않고 있다. 가족계획은 강요와 간섭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선진국의 피임약과 피임도구의 임상실험 대상이 되어 과도한 출혈로 쓰러져 가며 고통을 호소해도 “정신력으로 참으라”던 억지스러운 정부 정책이 계속됐다. 계속되는 임신과 육아에서 벗어나려는 소망이 더 간절했던 여성들의 자발적인 호응이 큰 요인이 되었음이 간과되고 있는 것이다. 자녀를 적게 낳더라도 남아선호사상 덕분에 이 세상에 태어나 보지도 못하고 사라진 수많은 죽은 딸들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던 것도 되짚어 볼 문제이다.
◇정치의식= 구술자들은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에 살면서도 정치적인 이슈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성인이 되어 한창 사회생활을 할 시기인 1970~80년대는 유신과 민주화운동, 광주 5.18, 6월항쟁 등 정치적으로 많은 이슈들이 문제가 되던 때이지만 이때에도 관심이나 문제의식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여성들이 정치문제에 무관심하고 자기주관이 없다는 것은 때로 여성들을 비하하는 것으로 비약된다. 그러나 이보다는 여성과 관련된 정책이나 이슈가 거의 없는데다 정치보다는 남편과 시집살이가 자신들의 삶에 더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주요요인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여성들의 생애사 구술을 통해 밝혀진 내용들은 같은 시대 역사책에서 본 내용들과 비슷한 듯 하면서도 분명 차이가 난다. 채록된 구술의 양이 적어 대표성을 띠거나 체계적인 정리가 된 것은 아니지만 여성들의 다양한 경험은 공식적인 기록만 가지고는 읽어내기 어려울 뿐 아니라 복합적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다방면에서 여성의 중요성이 새롭게 인식되고 있는 시대이다. 여성들의 삶의 이야기에서 묻어나오는 가치관과 느낌, 한숨들은 결코 무시되어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 역사를 더욱 입체적이고 풍성하게 해주는 귀한 자료들이다. 현대를 사는 후배여성들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새로운 여성상을 만들어내는 초석이기도 하다.
글: 장숙경 사단법인 역사․여성․미래 구술사업 특별위원회 위원장
[사단법인 역사․여성․미래 구술사업 특별위원회]
△장숙경 특별위원회 위원장 △강영경 공동대표 △권순형 교육문화위원회 위원 △이현주 교육문화위원회 위원 △권현주 특별위원회 위원
후원: 여성가족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