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모양처 꿈, 지금은 26년 현역강사… 그래서 더 만족스런 삶”

입력 2015-11-06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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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둥이 여성이 겪은 격동의 현대사]② 배우며 가르치며, 조무아의 70년

▲1960년대 이화여대 복장 검소화 운동. 출처: 이대학보DB

◇어린시절=“전 어떤 면에서는 해방둥이라도 그 시대를, 그런 격변하는 삶을 산 게 없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흰쌀밥에 고기반찬을 먹었고요. 할머니한테 반찬 없다고 투정하고 그랬었어요. 그 시절에.”

해방둥이 여성의 삶은 우리 사회가 격변기를 헤쳐온 것만큼이나 다양하다. 조무아씨는 1945년 경남 함안에서 6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집안은 부유한 대농으로 아버지는 전매청 공무원이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조무아씨의 어머니는 시부모 및 어린 자식들과 함께 남편이 있는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 전쟁이 끝난 뒤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들은 부산에 남았지만 조무아씨는 조부모와 함께 함안으로 돌아와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부산에서 국민학교를 나와야 중학교를 좋은 데 갈 수 있다고 생각해 부산으로 전학시키고 싶어 했으나 조부모가 맏손녀인 조무아씨를 데리고 있고 싶어 해 그냥 함안에서 학교를 다녔다. 학교는 한 학년이 한 학급밖에 없는 작은 학교였다. 조무아씨는 방학 때에는 부모님이 계시는 부산에 가서 놀고, 또 ‘새벗’ 등 어린이 월간지를 부모님이 꼭 사다 줘 친구들과 돌려 보기도 했다.

◇교육=조무아씨는 함안의 국민학교 개교 이래 처음으로 부산여자중학교에 합격했다. “너 시골 여기에 있어도, 부산에 못 데리고 가도 꼭 부산여중에 합격해야 한다”는 부모의 열망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반면 조무아씨가 나온 국민학교에는 한 학년 53명 중 15명이 여학생이었는데, 여학생 중 5명만 상급학교에 갔다. 나이가 든 뒤 동창회에 나온 한 친구는 자기가 4학년 때 중퇴한 이유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딸이 한글을 깨친 것을 알고는 학교를 안 보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당시 가정의 분위기에 따라 딸의 인생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씨는 부산여중, 부산여고를 거쳐 이화여대에 진학했다. 당시 부산여고에서 공부 잘하는 애들은 주로 이대나 부산대를 가고, 서울대나 연고대는 특별히 한두 명 정도만 갔다. 여자들은 여자대학 가는 게 너무 자연스러웠다. 꿈은 현모양처였다. 좋은 대학 나와 좋은 신랑감 만나 시집 잘 가서 살림 잘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의대고 어디고 희망하면 다 갈 수 있었는데 의사는 남자들이 하는 것이고 여자가 일선에서 일을 한다는 생각은 안 했던 시절이었다. 부산여고에서 가정학과에 12명이 입학했다. 대학 3학년 때 각자 희망에 따라 전공을 선택했는데 식품영양 전공이 제일 인기가 있었고, 그 다음이 의류직물학, 가정관리 전공 순이었다.

조씨는 가정관리 전공을 택했다. 좋은 주부가 되는 데 필요한 공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회생활과 경제활동=졸업한 뒤에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교사임용 순위고사가 있는데도 그걸 봐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당시 이대 가정학과는 사범대에 속해 있어 자연스레 학생들은 교직 과목을 이수했다. 조씨는 집에 가 몇 달 노는데 친척이 강사 자리가 있다고 해서 강사 생활을 했고 뒤늦게 순위고사가 있는 것을 알고는 몇 달 뒤 순위고사를 보고 신학기에 부산서여중에 발령받았다.

서여중에서 2년 있다가 1971년 부산여고로 전근 발령을 받았다. 그해에 결혼도 해 아이 둘을 낳고 5년 만인 1976년에 사표를 냈다. 부산여고에서 일급 정교사까지 하고 사표를 내니 사람들이 이상하다며 “왜 사표를 내느냐”고 했는데 속으로 ‘우리 애들 잘 키우는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애들이 당시 세 살, 다섯 살이었다. 어느 날 딸이 “엄마, 선생 그만해라”고 했고 또 ‘남편이 벌어다 주는 거 가지고 가정주부로 사는 게 편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과감히 사표를 냈다.

사표를 내고 집에 있으니 대학에서 강의를 나와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만 해도 부산여고 가정 선생이면 부산에서 일류였다. 또 교사 시절 예비교사 출제위원(한 해에 대학교수 2명, 고등학교 교사 1명이었다)도 하고, 교사임용 순위고사 출제위원도 하고 너무너무 잘나갔다. 그런데 전업주부를 하겠다고 사표를 내니 대학에서 강의 요청이 온 것이었다. 한성여대(현 경성대), 부산여대(현 신라대) 모두 2년제 초급대학인데 일 주일에 하루 강의를 나갔다. 그후 2, 3년 지나자 대학에서 전임을 해 보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그러나 하기 싫다고, 안 한다고 하다가 남편 직장 따라 서울로 오면서 교직에서 아예 손을 놓아 버렸다.

◇결혼생활=남편은 경남고 출신이며 세 살 차이였고, 중매로 만났다. 조씨는 당시 올드미스로 간주되는 스물일곱 살이라 9월에 만나 3개월 만에 결혼했다. 선 보고 괜찮으면 그냥 결혼하던 시절이었다. 남편은 울산에 회사에 있어서 주말마다 부산으로 와 데이트를 했다. 이후 남편이 부산사무소로 와 부산에 같이 있다가 서울로 가게 되자 조씨는 학교에 사표를 냈다. 처음에는 전세로 시작했지만 결혼 뒤 맞벌이를 했기에 몇 년 지나지 않아 집을 사고 아파트로 옮겼다.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왔을 때도 남편 월급으로 네 식구가 먹고살 수 있었다.

맞벌이를 하는 동안에는 집에 상주하는 식모를 두었고, 친정엄마나 시어머니가 가끔 와 살림을 봐 주었다. 남편이 막내라 시부모가 연로했다. 시아버지는 서울로 이사 오기 전에 돌아가셨고 시어머니는 장수하셨다. 서울에 온 뒤에도 방학 때면 애들 둘을 데리고 시댁에 내려갔다. 의무적으로 그래야 된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경상도 남자답게 상당히 가부장적이고 남성우월주의적이긴 했지만, 신식교육을 받아 남녀평등 의식이 있었다.

서울에 와 2~3년 전업주부를 하니 좋았다. 친구나 동창들 정도만 만나고, 조금 시간이 있으니 취미활동도 했다. 도자기 굽기, 영어회화 공부 등 취미 생활만 하고 경제활동은 안 하고 살았다.

그렇게 몇 년을 놀다가 상담 자원봉사자가 되었다. 서울시의 상담 자원 봉사자 교육을 받고, 여자 직업 전문학원, 남자 특수 기능 학교 등에 가서 상담 자원 봉사를 했다. 한 3년 하다가 1989년 부모교육 강사가 되었다. ‘페어런트 이펙티브니스 트레이닝(Parent Effectiveness Training)’이라는 미국 프로그램인데 부모 역할을 효과적으로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도입될 때 배워 1기 강사가 되었다. 당시에는 처음이라 미국에서 강사가 직접 와 연수시켰고, 이 때문에 국제 강사 자격증을 받았다. 이후 현재까지 26년째 한 해도 쉬지 않고 강의를 하고 있다. ‘칭찬 꾸중 격려 3박자의 힘’(주변인의길, 2014), ‘내성적인 아이’(팜파스, 2014), ‘부모역할, 연습이 필요하다’(깊은나무, 2014) 등 여러 저서도 출간했다.

◇현재=조씨는 살아오면서 여성 불평등을 크게 느낀 적은 없었다 한다. 교사는 다른 직업보다 차별이 적고, 또 집안에서도 맏이로 대우받았다. 45년째 같이 살고 있는 남편과는 프로야구도 보고 찜질방도 같이 가면서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결혼 초부터 무조건 복종만 하지 않고 남편과 힘을 조절했기 때문에 지금 남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삶의 만족도가 높은데, 만일 전업주부였다면 만족도가 떨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건강과 일이 있는 삶이 좋다고 생각한다.

글: 권순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겸 역사․여성․미래 구술사업 특별위원회 교육문화위원

[사단법인 역사․여성․미래 구술사업 특별위원회]

△장숙경 특별위원회 위원장 △강영경 공동대표 △권순형 교육문화위원회 위원 △이현주 교육문화위원회 위원 △권현주 특별위원회 위원

후원: 여성가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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