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권 한국SR전략연구소 부소장
한파 없이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났다. 언론에선 이번 수능의 난이도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서울대에 가기 위해 필요한 점수가 몇 점인지에 대한 예측도 나온다.
시중에 떠도는 시험문제를 보고 있자니, 문득 질문이 떠오른다. 이 문제들을 잘 푸는 것과 아이들의 삶이 행복한 것 사이의 상관관계는 얼마나 될까? 아이들은 이 문제들을 잘 풀면 자신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문제 하나에 울고 웃는다. 잠을 줄이고,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고 학교에 가,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 시간을 미뤄둔다.
사회의 역할은 무엇일까? 아이들이 그렇게 20여년 가까운 시간을 문제에 매달려 살았으니, 이 문제만 잘 풀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믿음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나 그러기에 사회는 부실하다. 20여년을 열심히 살았던 아이들은, 수학능력시험이 끝난 후 사회생활로, 군대로, 대학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이 아이들에겐 새로운 관문들이 더해지고, 다시 새로운 관문들이 더해진다.
관문이 없는 사회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평생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온 이가, 그 보답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지금의 사회에서 아이들은 시험 후, ‘청년’이라는 새로운 계층으로 흡수될 뿐이다.
청년. 푸르고 맑아야 할 청년은 현재 한국사회에서 가장 힘든 세대 중 하나다. 포기해야 하는 것이 많고, 포기하고 버려도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확신은 없다. 누군가는 우리나라의 청년이 참 착하다고 했다. 자기들의 삶이 힘든 것에 대해 다 자기 탓이라고만 생각해대니 착해도 너무 착하다는 것이다. 사회의 분위기 탓일까. 조금만 사회의 탓을 하고 나라탓을 하면 소위 ‘좌빨’로 몰리곤 하는데 누가 감히, 이 사회 앞에서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노오오오력’을 할 수밖에. ‘투쟁’이라는 말이 자신의 삶을 진전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읽히지 않고, 이념의 프레임에 갇혀 버린 것이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지금의 청년들만큼 착한 청년을 알고 있다. 너무 착해 ‘바보’라고 불렸던 청년 전태일. 11월 13일은 전태일의 45주기다. 후진국형에 머물렀던 한국의 노사문화가 조금이라도 진일보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청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청년의 착함은, 지금 청년들의 착함과 조금 달랐던 것 같다. 이 청년은 투쟁하는 것이 착하다고 생각했다. 주위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근로기준법의 준수가 필요하다고 외치는 것이, 이 청년이 생각하는 착함이었다. 순응으로서의 착함이 아닌, 변화의 원동력으로서의 착함. 나의 포기가 아닌 타인을 살리기 위한 투쟁. 그 철학 앞에 한없이 부끄러운 요즘이다.
우리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말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가장 표준적인 지침인 ISO26000은 사회적책임의 주요 주제 중 하나로 노동관행을 꼽는다. ISO26000의 노동관행 지침은 국제노동기구(ILO)에서 근거한다. 국제노동기구는 국제노동기준을 제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삼자(정부, 근로자, 사용자) 구조를 가진 UN기구이다. 한국에서 ILO는 주로 한국 정부에게 무엇을 권고하고 경고하지만 보통 외면 받는 존재로 해석된다.
다시 돌아와, 아이들의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는 추상적으로 희망과 용기를 주는 나라가 아니다. 아이들에게 금방 다가올 미래인 ‘청년’이 뜻한 바를 이룰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춘 나라가, 아이들의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다. 그리고 ‘청년’의 현재이며 미래인 ‘노동하는 사람’의 권리가 지켜지고 정당하게 옹호를 받는 나라다. 이러한 문제를 기업이 정당하게 기업 경영 상의 책임의 일부로 생각하는 나라다. 기성 세대는 이러한 책임의 일부를 이행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산다.
고대권 한국SR전략연구소(코스리) 부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