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99년 5월 서울 종로구 사직동 허름한 주택가. “NG, 그렇게밖에 연기 못해!”‘해피투게더’의 오종록 PD의 불호령과 함께 한 줄 대사 연기를 스무 번째 반복하는 연기자가 있었다. 바로 신인으로 주연을 맡은 김하늘이다. 옆에서 지켜보던 기자조차도 안쓰러울 정도였다. 계속되는 NG와 부족한 연기력 지적에 결국 김하늘은 결국 눈물을 쏟았다.
#2.“차라리 국어책 잃어!”‘아들과 딸’‘흐르는 것은 세월뿐이랴’‘카레이스키’등 명품 드라마를 만든 장수봉 PD가 단막극을 연출하면서 신경이 곤두섰다.“아파서 학교에 못 가겠어요”라는 한 줄 대사를 제대로 못 하는 신인 연기자에게 질타했다. 이윽고 어머니역을 맡은 고두심의 대사가 즉석에서 바뀌었다. 고두심은 원래 “왜 학교 안 가니”라는 대사를 하는 거였는데 딸 역을 한 신인 연기자가 “아파서 학교에 못 가겠어요”라는 이 간단한 대사 연기를 못해 “아파서 학교에 안 가니?”라는 대사로 바뀐 것이다. 대사가 바뀐 뒤 신인 연기자는 “예”대답만 하는 연기만 했다.
#3.‘김태희, 회당 5000만 원 받는 연기 민폐녀’‘김태희 왜 연기가 늘지 않을까’…2015년 한 해 동안 주중 미니시리즈 중 유일하게 20%대 시청률을 돌파한 SBS 드라마 ‘용팔이’가 시작되자마자 여자 주연, 김태희의 연기력에 대한 대중매체의 비판이 쏟아졌다. 기자를 만난 김태희는 “연기에 대해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 했어요”라고 말했다. 기자는 김태희에게 “김태희씨는 한 번에 연기력이 도약하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분명 이전보다 연기력이 나아지고 있어요. ‘용팔이’ 연기는 지난 드라마보다 훨씬 좋아요. 조급해하지 말고 연기력의 절반을 차지하는 대사 발성부터 조금씩 고치세요”라고 답했다.
기자가 목격한 연기력과 관련된 세 가지 풍경이다. 영화배우나 탤런트에게 연기력은 가장 중요한 본질이다. 연기력은 연기자의 경쟁력과 인기, 몸값을 좌우할 뿐만 아니라 드라마와 영화의 성패를 결정짓는 핵심적 요소다.
이 때문에 “2008년 주말 드라마 ‘행복한 여자’로 데뷔했는데 연기를 못해 방송도중 퇴출당했다”고 말한 탤런트 이성엽처럼 방송 도중 연기력이 부족한 연기자는 중도에 퇴출당하거나 비중이 줄어드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또한, 캐스팅 된 뒤 극본이나 시나리오 리딩 때 연기를 못해 주연이 교체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스타에서부터 일반 연기자까지 연기력에 울고 웃는다. 연기력 때문에 스타로 부상하고 부족한 연기력 때문에 스타의 자리를 내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연기력이란 무엇이고 뛰어난 연기력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문화평론가 D.믹슨은 그의 저서‘연기자 이론’에서 “배우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배역에서도 자신을 맞출 수 있어야 하며 모든 행동을 믿을만하고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즉 캐릭터의 내적 확신과 지식을 브라운관 혹은 스크린이라는 장벽을 넘어 시청자나 관객의 의식 속에 직접 도달시키는 배우가 좋은 연기력을 가진 연기자라는 것이다. ‘스타’의 저자 리처드 다이어의 지적처럼 연기는 캐릭터의 창조(Creation)와 재현(Representation)에 관련된 것으로 캐릭터를 창조하고 재현을 표정, 목소리, 몸짓, 신체의 자세, 신체의 운동 같은 연기 기호로 드러내게 된다. 이 때문에 코클랭 같은 연기론 전문가는 연기의 기본 요소로 대사의 전달을 위한 발성, 진실 되고 자연스러운 어조, 배우의 매력, 그리고 배우의 좋은 눈을 꼽고 발성과 살아 있는 표정 연기, 외형과 내면의 조화를 일치시키는 연기를 하는 사람을 뛰어난 연기자로 꼽는다.
이러한 전문가들이 말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며 뛰어난 연기자로 평가받는 연기자는 누구일까. ‘올드보이’‘친절한 금자씨’의 박찬욱, ‘설국열차’‘괴물’의 봉준호, ‘왕의 남자’‘사도’의 이준익, ‘베테랑’‘부당거래’의 유승완,‘암살’‘도둑들’의 최동훈 등 유명 스타 감독들은 첫손가락에 김혜자를 꼽고 이어 송강호, 이병헌, 설경구, 김윤석, 오달수, 황정민, 하지원 등을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로 평가한다.
그렇다면 스타 PD인 ‘허준’‘대장금’의 이병훈PD, ‘겨울연가’‘가을동화’의 윤석호PD, ‘별에서 온 그대’‘바람의 화원’의 장태유PD 등 스타 연출자들은 연기력이 뛰어난 탤런트로 누구를 거명할까. 스타 PD들의 첫손가락에 드는 연기자로 남자 탤런트는 이순재와 김명민을, 여자 탤런트는 고두심과 나문희, 고현정을 꼽는다. 언제 어느 배역을 맡겨도 정말 뛰어난 연기를 하는 탤런트로는 김해숙이 으뜸이라고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젊은 연기자 중 문근영을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라고 평가하는 스타 PD들이 많다.
반면 PD나 영화감독들, 시청자와 관객들에게 연기를 못한다고 비판받는 배우는 누가 있을까. 스타 중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는 연기자들이 적지 않다. 고소영, 한예슬, 이연희, 황수정, 권상우를 비롯한 일부 스타들이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연기력 논란이 일고 있다.
그렇다면 한때 연기력 부족으로 비판받다 이제는 뛰어난 연기력으로 찬사를 받는 스타들은 누구일까. 이병헌이다. “신인 때 드라마에 투입돼 연기할 때 연출자분들한테 ‘국어책을 읽어도 그 정도 읽겠다’라고 비판받았어요. 죽을 맛이었어요”라고 말하는 이병헌은 이제 스캔들마저 무력화시키는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주고 있다.
한동안 연기를 못하는 여자 스타라고 비판받은 연기자 중 한 사람이 김민희였다. 하지만 이제는 국내 영화제뿐만 아니라 해외영화제에서도 연기 잘하는 배우로 평가받는다. 김민희가 연기를 잘하는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지난 2006년 방송된 드라마 ‘굿바이 솔로’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만을 캐스팅하는 기민수 PD와 노희경 작가의 ‘굿바이 솔로’주연진에 의외의 인물이 있었다. 바로 연기 못하는 김민희였다. 노희경 작가에게 물었다. 왜 연기 못하는 김민희를 캐스팅했냐고.“김민희에 대해 오디션을 통해 연기력을 봤어요. 도저히 안 돼 캐스팅을 안 했어요. 그런데 계속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다며 연기를 연습해 오는 거예요. 6번째 찾아왔을 때 ‘저런 열정이면 연기력이 늘겠다’라는 생각으로 캐스팅했어요.”김민희는 ‘굿바이 솔로’에서 이전의 연기 못하는 김민희의 모습을 상상조차 못 할 정도로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였다. 이 작품으로 연기력 인정받은 배우로 도약한 김민희는 이후 출연한 적지 않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연기파 배우로 전문가와 관객에게 인정받았다.
김민희나 이병헌처럼 일취월장하는 배우도 있지만 주원처럼 조금씩 조금씩 연기력을 향상해 정점에 이른 배우들도 있다.‘주원의 연기는 딱딱한 고체 같아 부자연스러움의 극치다. 연기의 세기도 부족할 뿐만 아니라 캐릭터의 성격을 드러내는 표정에서부터 액션은 과장돼 있다.’ 2010년 방송된 드라마‘제빵왕 김탁구’를 통해 드라마 연기자로 첫선을 보인 주원에 대해 기자는 이렇게 통렬히 비판했다. 이 기사를 읽고 기자를 찾아온 주원은 “연기력 논란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연기력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해 조금씩 나아지는 연기자가 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주원은 그의 말을 작품을 할 때마다 실천에 옮겼다. 이후 드라마‘오작교 형제들’‘7급 공무원’‘각시탈’ ‘굿닥터’‘내일도 칸타빌레’‘용팔이’ 등 출연하면서, 그리고 영화 ‘패션왕’ ‘그놈이다’를 거치면서 향상된 연기력을 보였다. 이렇게 한발 한발 노력해서 한때 연기력 비판을 받았던 주원은 모든 연기자들이 받고 싶어 하는 2015 SBS 연기대상 트로피를 들어 올린 것이다.
연기력은 이처럼 연기자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부분이다. 아무리 인기가 있는 스타라 하더라도 연기를 못하면 진정한 스타로 인정받지 못한다. 연기력이 뛰어나면 시청자와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며 찬사를 받는다. 스타들이 연기력 때문에 상승하기도 하고 연기력 때문에 추락하는 것이 바로 연기력의 두 얼굴이다.(이글은 예향 2월호에 게재된 글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