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체재 9년간 반일운동…커티스음악원도 다니지 않아
친일 행적으로 논란이 됐던 안익태의 반일 운동에 관한 자료가 최근 발견됐다.
재미 민간사학자 유광언씨는 11일 안익태에 대한 새로운 기록들을 공개했다. 그는 안익태의 1930년대 미국 유학 시 족적을 제대로 확인하고자 신한민보와 한인학생회보 등 문서를 찾고 안익태가 다닌 것으로 알려진 음악교육기관을 방문해 조사했다.
유씨에 따르면 최근 친일 행적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는 안익태는 적어도 미국 체재 9년간은 적극적으로 반일 운동을 했고, 애국가는 순수한 애국 애족의 열정으로 만들었다. 안익태는 1930년대 총독부에서 한국인에게 발급하는 98매의 여권 중 하나를 받아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안익태는 5년에 걸쳐 애국가를 완성했고, 애국가 악보는 미국에서 출판되자마자 일제의 금지 단행본 목록에 추가됐다.
안익태의 1930∼1933년 신시내티음악원 생활은 알려진 바가 없지만, 유씨는 해당 학교로부터 학적부와 성적표를 얻어내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당시 안익태는 1930년 9월 18일 작성된 학적부에 ‘Pyeng Yang, Korea(평양, 한국)’이라고 주소를 적었다. 유럽 생활 때 ‘평양 조선’, ‘일본 동경’이라고 주소를 적었던 것과 다르다. 특히 그는 독일 안익태 매니지먼트사에서 만든 소개서에 ‘일본의 속국인 조선의 평양에서 태어났다’고 적은 적도 있었다.
특히 안익태가 커티스 음악원에 다닌 것은 잘못된 기록인 것으로 확인됐다. 유씨가 해당 학교 문서보관소에 문의한 결과 ‘안익태는 이 학교 학생도 아니었고, 가르친 적도 없다’는 공식 답변을 받았다.
유씨는 1936년 초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명의로 신한민보에서 인쇄 판매된 대한국 애국가(Korean Nation Hymn)와 1934년 안익태의 한국생활 모음곡을 출판한 엘칸 보겔판의 ‘국가(Nation Anthem)’의 차이도 지적했다. 그는 안익태가 국권이 회복되면 ‘찬가(Hymn)’가 ‘국가(Anthem)’로 바뀌기를 희망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