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 영화에서 파시즘 시대에 유행하던 신고전주의 건축물을 이용하고 있다. 이 건물은 신화시대의 거대한 신전 같다. 영화 안에서 개인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대단히 왜소하게 그려지는 반면, 이들이 머무는 공간은 사람을 압도할 정도로 과장돼 있다.”
영화 평론가 한창호씨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1941.3.16~)의 영화 ‘순응자’에 대해 바친 평론이다. 그의 말처럼 베르톨루치는 가히 상징의 마술사였다.
그는 이탈리아 파르마에서 태어나 지적 분위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시인이자 평론가였던 아버지를 따라 어려서부터 영화를 보러 다녔던 것. 로마대학교에서 근대신학을 공부한 그는 아버지의 친구 우베르토 파솔리니의 데뷔작 ‘아카토네’(1961)의 조감독을 맡았다. 이어 1962년 시집 ‘미스터리를 찾아서’로 ‘프레미오 비아레지오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1962년 로마에서 촬영한 데뷔작 ‘죽음의 신’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감독으로 인정받았으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1964년 ‘혁명전야’로 칸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거듭된 흥행 실패로 제작비를 확보하지 못하자 그는 시나리오를 쓰며 연명해야 했다. 그러던 중 당시 누벨바그 영화에 고무돼 1968년 장 뤽 고다르의 형식을 흉내 낸 ‘동반자 Il’를 만들었다.
그러나 1970년 그가 과거에 적이라고 생각했던 거대 자본 파라마운트와 손잡고 ‘순응주의자’를 발표하면서 존경해 마지않던 고다르 식의 영화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그는 이어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대박을 쳤지만, 파격적 성행위 묘사가 문제 돼 그는 결국 두 달간 투옥됐다. 2011년 칸영화제 명예황금종려상, 2012년 유럽영화아카데미 평생공로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