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네가 그리는 그 그림

입력 2016-03-22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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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막 쿠퍼티노 애플 캠퍼스 타운홀에서 올해 첫 애플 스페셜 이벤트가 막을 내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몇몇 이들은 실망했을 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공공연히 흘러나왔던 루머 속의 이야기가 그대로 들어 맞았으니까. 4인치 아이폰SE와 9.7인치 아이패드 프로의 존재는 모두가 예측하고 있던 바라 싱겁기까지 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새로운 하드웨어에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동안 애플은 분주하게 조금 더 큰 그림을 준비했다. 아이패드와 아이폰에 대한 이야기는 무시무시하게 쏟아져 나올테니, 나는 현장에서 느낀 다른 이야기부터 차분하게 풀어보려고 한다.

팀 쿡은 행사 시작과 동시에 곧장 책임감에 대해 언급했다. 전 세계에서 사용하고 있는 애플 기기의 수가 10억 대를 넘었으며, 애플 측은 그 엄청난 양의 고객 데이터를 보호해야 할 책임을 느낀다는 얘기였다. 그는 기업(굳이 애플이 아니더라도)이 가져야 하는 책임에 대해서 몹시 훌륭하게 의식하고 있었고,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세련된 방법으로 풀어내고 있었다. 애플의 건강한 쇼맨십에 박수를 보내는 바다. 그리고 그 책임은 비단 정부와의 ‘프라이버시 전쟁’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기업이 보여줘야 할 도덕적인 액션에도 충실했다. 환경과 건강. 마흔 살을 맞은 애플이 오늘 던진 가장 묵직한 화제다.

2년 전, 애플은 전체 시설의 100%를 재생 에너지로 구동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실제로 2012년 부터 애플의 데이터센터는 태양광, 풍력, 수력 등 재생 에너지에 의해 돌아가고 있다. 마냥 멀게 느껴지는 이 일은 실제론 우리 삶 속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우리가 늘상 지니고 다니는 아이폰과 아이패드, 애플워치를 움직이는 힘이 재생 에너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 하다못해 아이폰을 비롯한 애플의 전 제품을 포장하는 종이 패키지만 해도 재활용 자원을 사용하고 있다.

종이도 재활용하는데 애플 기기라고 재활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애플 리뉴 프로그램은 그 취지도 근사하지만 로고가 너무 예뻐서 마음이 끌린다. 쓰던 제품을 애플에 맡기면 좋은 곳(?)에 재활용 혹은 재사용하는 시스템이다.

이쯤에서 새로운 친구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이 친구는 새로운 아이폰이나 아이패드 처럼 애플 스토어에서 구입할 수는 없지만 귀엽고 사려깊다. 바로 리암 로봇이다. 리암은 아이폰의 재활용을 돕기 위해 만든 로봇으로 숙련된 몸놀림으로 우아하게 아이폰을 분해한다. 패널부터 나사 하나까지 분리해내는 모습은 예술적이기까지 하다. 이래봬도 연간 120만 대의 휴대폰을 분해할 정도로 분주한 녀석이다. 이렇게 떨궈져 나온 부품들은 각각 새로운 역할을 부여 받는다. 아이폰의 마더보드는 태양광 패널로 다시 태어나고, 서랍 속에서 썩어갈 예정이던 우리의 구형 기기들은 이런 방식으로 저마다 세상의 일부가 된다.

사실은 어느 기업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어느 기업에서나 해야 하는 일이다. 애플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재활용을 이토록 쿨한 일로 포장할 수 있는 것은 애플만의 재주다. 그리고 이건 아주 중요하다. 수많은 자원과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는 이 시대에 달콤한 과일의 이름을 가진 이 기업이 맺은 열매에 주목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자, 이제 조금 더 고무적인 이야기를 나눠보자. 지난 해 애플은 헬스킷을 공개했다. 아이폰으로 사용자의 움직임과 건강 관련 수치, 정보를 측정 및 기록할 수 있는 의학 연구 도구다. 의학 연구에서 숫자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데이터를 제공할 수록 더 큰 수치를 얻게 된다. 그리고 의미있는 연구 데이터를 얻기 위해서는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된다. 적어도 여태까지의 의학 연구에서는 그랬다. 리서치킷은 기기가 사람들의 삶에 기여할 수 있는 질적인 면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줬다. 사람들은 리서치킷을 통해 수많은 데이터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특정 질병에 대한 더 면밀한 연구가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어떤 특별한 진료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주머니 속의 작은 아이폰으로 증상에 대한 기록을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환자들에게도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파킨스 병을 가진 멜린다의 경우를 보자. 그녀는 아이폰의 ‘MPower’ 앱을 통해 매일 매일 어디에서나 그녀의 현재 상태를 기록하고 의료진과 정보를 공유한다. 아이폰 디스플레이나 모션 센서 등을 활용해 민첩성, 균형감각 등을 측정하는 원리다. 이 앱을 통해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파킨스 병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다. 연구진이 질병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데 도움이 됐음은 물론이다.

아이폰 카메라를 통해 아이들의 얼굴을 촬영하면, 안면 인식 알고리즘을 사용해 일련의 영상에 대한 감성 분석이 가능한 ‘Autism&Beyond’ 앱도 인상적이다. 이 앱을 통해 18개월 가량의 유아에게서 감정 및 발달 관련 문제를 감지할 수 있는지 연구를 진행 중이다. 만약 의미있는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면 자폐증의 조기 진단과 치료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미 이런 식으로 많은 의료기관과 대학에서 리서치킷을 기반으로 한 연구에 돌입했다.

그리고 지난 1년 간 리서치킷이 보여준 성과가 ‘케어킷’으로 돌아왔다. 리서치킷이 연구를 위한 플랫폼이었다면 케어킷은 직접 사용자의 건강을 관리하고 재활과 치료를 돕는 용도다. 예를 들어 수술 후의 환자가 케어킷을 사용하는 경우 매일 복용해야 하는 약이나 붕대를 가는 타이밍, 운동, 식단 등의 세부항목을 쉽고 자세하게 관리하고 공유할 수 있다. 당뇨처럼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병에도 유용하다. 물론 환자의 프라이버시 데이터는 철저히 보호된다. 케어킷 역시 올해 4월부터 오픈소스로 공개될 예정.

헬스킷은 애플이 여지껏 보여준 것 중 나를 가장 감동 시킨 도구다. 내가 매일 들고다니는 아이폰이나 애플워치보다도 더욱 더. 사랑하는 사람의 건강을 염려해본 일이 있는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쓰러지면 우리는 순식간에 깨닫게 된다. 우리가 얼마나 나약한지. 습관처럼 “병원 좀 가봐”라고 말해봤자 바쁜 현대인들은 몸이 보내는 사인을 무시하기 일쑤다.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가까이서 객관적인 데이터를 통해 몸의 상태를 체크하고, 채근질해줄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하다.

다시 한번 상기해보자. 환경과 건강이라니. 애플이 오늘 꺼낸 이야기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화제다. 우리가 평생을 곱씹어야 하는 화제이기도 하고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건강하게, 더 건강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애플은 단순히 하드웨어를 만드는 기업을 벗어나 미래를 보는 큰 그림을 제시했다. 바로 이것이 iOS 기기의 작은 화면을 벗어난 진짜 애플 생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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