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헌 부국장 겸 정치경제부장
첫 구조조정 대상으로 해운과 조선업종을 정한 것 이외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것은 없다.
정부는 철강과 석유화학 업종도 기업활력제고법(원샷법)을 통해 자체 구조조정을 지원하겠다는 입장이지만 구체적인 일정과 방안은 정해지지 않았다.
또 건설업종은 구조조정을 하겠다, 안 하겠다 어떠한 입장도 없다.
4·13 총선 이후 갑자기 불거진 기업 구조조정 추진 상황을 보면 정부의 난맥상이 그대로 드러난다. 수만 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대규모 해고와 60여 년간 우리나라의 주력산업을 수술하는데, 이렇게 허술하게 구조조정을 진행할까 싶다.
그동안 지지부진하던 취약업종 구조조정이 급물살을 타게 된 발원지는 청와대도, 국회도, 정부부처도 아닌 미국 워싱턴DC의 한 식당에서 시작됐다.
여소야대의 총선 결과에 정가의 흥분이 가시기도 전인 지난달 15일 유일호 부총리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가 열린 워싱턴에서 출입기자단과 저녁 자리를 가졌다.
유 부총리는 이 자리에서 “취약업종에 대한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며 “직접 챙기겠다”고 강한 추진 의지를 밝혔다.
특히 유 부총리는 “현대상선이 자구 노력을 진행 중인데, 용선료 협상 결과가 중요하다”며 “용선료 협상이 예상대로 안 되면 액션을 취할 수밖에 없다” 고 구조조정 대상 기업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까지 설명했다.
이때만 해도 구조조정의 키를 쥔 금융위원회는 물론 해운·조선업종 주무부처인 산업통산부, 해양수산부와 사전 협의는 물론 추진 일정, 구조조정 대상, 지원 방안 등 정해진 게 없었다.
유 부총리의 워싱턴 발언은 언론사마다 주요 기사로 다뤄졌고, 금융시장은 큰 혼란을 겪었다.
유 부총리의 취약업종 구조조정 추진 방침에 가장 먼저 화답한 것은 새누리당이 아닌 총선에서 승리한 더민주당과 국민의당 대표들이었다.
더민주 김종인 비대위원장은 지난달 20일 “본질적이고 적극적인 구조조정이 이뤄져야 한다” 며 실업자 대책을 선결조건으로 제시했다.
국민의당 안철수 상임 공동대표도 이날 “미시적 구조조정이 아니라 거시적 관점에서 구조개혁이 필요하다”며 “기업 하나하나의 구조조정 차원을 넘어서야 된다”고 지원 의지를 밝혔다.
여야 할 것 없이 기업 구조조정에 대해 지지 의사를 밝혔지만, 정작 정부는 좌충우돌하는 모습이다.
김영석 해수부 장관은 유 부총리의 워싱턴 발언 3일 뒤인 18일 “(유 부총리 발언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 원론적인 이야기”라며 “해운업종의 구조조정 충격을 최소화하겠다”고 밝혀 부처 간 엇박자를 드러냈다.
더 실망스러운 건 다음 날 열린 유 부총리의 취임 100일 기자간담회에서의 발언이다.
유 부총리는 김영석 장관의 입장에 대해 “맞다. 원론적인 이야기였다” 라고 말해 정부가 얼마나 무책임하고 부실하게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 줬다.
유 부총리는 기업 구조조정을 놓고 부처 간 엇박자가 나자 지난달 24일 부랴부랴 경제현안회의(서별관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이날 회의 결론은 이틀 뒤 열리는 임종룡 금융위원장 주재 구조조정 협의체에서 추진 일정과 방향을 발표하겠다는 것이었다. 임종룡 위원장은 26일 구조조정협의회 회의를 가졌지만 구체적인 추진 방안을 내놓지 못했다.
이제 구조조정 자금을 놓고 기재부와 한국은행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기재부는 한은의 발권력을 활용하겠다는 입장이고, 한은은 국민적 합의 없이 마음대로 발권력을 동원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정부가 취약업종 구조조정 추진 계획을 밝힌 지 5개월 만에, 유 부총리가 워싱턴 발언 20여 일 만에 구조조정 자금 마련을 위한 첫 회의가 지난 4일 열렸다.
정부의 사후약방문식 행정에 대해 수없이 많은 지적을 받았지만, 기업 구조조정도 예외는 아니다. 구조조정의 골든타임은 빠르게 흐르고 있는데 정부의 대처는 한없이 느리다.
구조조정 재원 마련, 실업대책, 초과공급업종 사업 개편 등 산적한 현안에 대해 부처간 협치(協治)가 어느 때 보다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