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관리인 분야 첫 여성 CRO…60에 쌓은 ‘세컨드 커리어’
그래서 인생을 롤러코스터에 비유하기도 한다. 오르막길을 하염없이 오르는 동안 쌓은 경험과 지혜, 인내, 노력 등이 헛되지 않기 위해선 정상에 다다를 때쯤 숨고르기를 하고‘내가 앞으로 할 수 있는 다른 것’을 적극 찾아나서야 한다.
100세 시대에 제2의 꿈과 도전으로 퇴직 이후 새로운 삶을 사는 김행미 타임건설 구조조정담당 임원(CRO:Chief Resource Officer) 겸 한국양성평등교육원 교수(전 KB국민은행 본부장)처럼 말이다. 올해 우리나라 나이로 60세가 된 그는 여전히 열정으로 가득차 있고 에너지가 넘친다. 중저음의 차분한 목소리는 안정감과 신뢰감을 더한다.
“33년간 KB국민은행에서 일하다 지난 2012년 현업에서 나왔어요. 그 때‘60세까지는 일을 해야하지 않겠느냐’라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일하고 있는 게 너무 좋아요. 세컨드 커리어를 어떻게 가지고 갈 것인가가 고민하고 결정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대부분 퇴직하면 잠깐 쉬고 싶어 하는데 그게 함정이에요. 쉬면 안 돼요. 여러 가지 활동을 오히려 더 많이 해야죠. 쉬는 사이에 새로운 인력들이 진입해오거든요. 일은 할 수 있을 때 해야해요. 100세 시대인데 더 나이 먹으면 체력이 딸려 더 힘들죠.(웃음)”
김행미 교수는 2009년부터 여성단체 WIN(Women In Innovation) 활동을 했다. 그리고 퇴직 이후 본격적으로 WIN 멤버들과 스터디그룹을 형성해 코칭 공부를 시작했고 코칭 자격증도 취득했다. 그 덕에 대기업의 임원 후보군들을 상대로 하는 비즈니스 코칭 업무를 할 수 있었다. 양평원에서 신규 강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WIN의 추천을 받아 2013년 외래교수로 임용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김 교수는 은행 퇴임 동기들과 함께 한국생산성본부에서 법정관리인·감사양성교육을 이수했고, 지난해 법원으로부터 타임건설 법정관리인으로 선임돼 CRO로 업무를 보고 있다.
“법정관리인 분야에서는 제가 여성 최초 CRO예요. 교육 이수자 중에는 지점장급 이상, 본부장, 부행장 등 금융업계 종사자분들이 가장 많아요. 퇴직 이후 자신의 커리어를 살릴 수 있는 많은 길이 있다는 사실을 많은 분께 알려주고 싶습니다. 또 자신의 커리어를 적극적으로 알려야합니다. 내가 필요한 분야에 적절히 추천받을 수 있도록 자기 홍보를 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현재 김 교수는 무려 ‘4잡(job)’을 뛰고 있다. 타임건설 CRO와 양평원 교수, 코칭 강사 외에도 강원랜드 사회공헌 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김 교수가 퇴임 후 제2의 꿈을 향해 바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데는 치열하게 살았던 젊은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자부한다. 그는 남성 중심의 보수적인 문화가 팽배한 금융권에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갔다.
“내가 재직하던 시절에는 대리도 시험에 합격해야 될 수 있었어요. 5과목 시험을 보는데, 정말 어려웠죠. 그래서 4수를 했어요. 큰 고비였죠. 3~4개월은 집중적으로 공부를 해야하는데, 집안일도 해야 하고, 아이도 키워야하니 힘들더군요. 눈물없이 들을 수 없는 스토리에요. 일 끝나면 독서실에 가서 공부하다 새벽 1시에 들어왔어요. 어떤 날은 공부도 못하고 새벽까지 졸다가 들어온 날도 있었죠.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렇게 하나 싶더군요. 그렇게 4년을 살았어요. 은행에 33년 일하면서 가장 힘든 시기였던 것 같아요.”
남들보다 어렵게 대리가 된 김 교수는 은행원 생활 20여년 만에 지점장 타이틀을 얻었다. 동료들의 부러움과 지인들의 축하를 속에 대전의 한 지점을 도맡게 됐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첫 지점장으로 발령받은 곳은 일명 ‘블랙홀’로 통하는 곳이었다. 해당 지점은 저성과·비인기 지점으로 꼽혔고, 퇴사의 수순을 밟는 곳으로 정평이 나 있던 곳이었던 것이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이 있어요. 목 좋은데 있으면 얻어오는 게 많다는 거죠. 그만큼 은행은 자리가 중요해요. 100억원 짜리 수표가 생겨 통장을 만들려고 한다면 보이는 곳을 우선 찾게 되겠죠. 나는‘왜 하필 그 지점이야’ 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나도 이제 집에 가는구나(퇴직해야 하는구나)’ 싶더군요. 그게 나를 가장 미치게 만들었어요. ‘김행미도 결국 못하고 가는 구나’라는 시선을 견딜 수 없었어요. 그 부담감에 조각잠을 자게 됐죠. 자다깨면 새벽 3시, 새벽 4시 였어요. 이 지점을 어떻게 이끌어야할지 막막하기만 했죠.”
눈앞이 캄캄한 건 김 교수뿐만이 아니었다. 여성 리더를 처음 맞는 해당 지점 행원들도 마찬가지. 손발이 척척 맞아도 부족할 판에 낯선 업무 환경에 적응하느라 서로 바빴다. 따라서 김 교수가 환경 탓만 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자존심도 허락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해내고 말겠다는 생각뿐이었단다.
“자리 탓만 할 수 없잖아요. 그럼 결국 사람을 팔 수 밖에 없죠. 콘텐츠를 팔려니 상품은 다 똑같고, 구성원들을 팔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미친 듯이 대외활동을 했어요. 당시 충청지역 하나은행과 삼성그룹이 조찬모임을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고객 중 한 분께 나를 좀 그 자리에 데려가 달라고 했죠. 정말 열심히 다녔어요. 그 곳에서 지방 모 대학 총장을 만났는데 취업특강 해줄 사람을 찾으시더라고요. 당장 제가 하겠다고 했죠. 그리고 강의료 대신 우리 지점의 고객이 돼 달라고 했어요. 그렇게 학교자금 30억원을 유치해 왔어요.”
김 교수는 네트워킹의 중요성을 깨닫고 대전에 위치한 고려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입학해 석사 학위를 받았다. 거기서 원우회 총무와 회계 담당을 자처하면서 지역민들과의 접점을 넓혀갔다. 성과는 자연스레 따라왔다. 충정지역 KB국민은행 본부장으로부터 ‘사내놈들은 다 뭐하고 여자 지점장이 저렇게 뛰어다니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결과 높은 평가를 받으며 4년간의 대전 생활을 마무리하고 서울로 복귀했다.
서울로 컴백한 김 교수는 3년 더 지점장을 자리를 지키다 본부장으로 발탁돼 2008년부터 2011년까지 KB국민은행 영동,강동지역 본부장을 역임했다. 당시‘영업통’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뛰어난 영업 실적을 보여줬고, 4대 시중은행(국민·신한·우리·하나 은행) 최초 차기 여성 부행장 후보로 꼽히며 업무능력을 높게 평가받았다. 그러나 금융권의 유리천장은 너무도 두터웠다. 임원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33년간 몸담았던 직장을 떠나야했다.
김 교수가 이렇게 열심히 살았고 퇴직 후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데엔 직장에 있는 동안 다져놓은 네트워크가 큰 몫을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인터뷰 내내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여성들이 경제활동을 할 때 가장 큰 문제점 역시 네트워크 형성 부족을 꼽았다.
“네트워크를 잘 만들려면 본인의 의지와 노력이 필요해요. 여성들의 업무상 네트워크가 활성화되면 경쟁력은 배가 되겠죠. 활성화된 네트워크가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를 높일 수 있는 구조로 이어진다면 여성 인력은 대한민국 경제에 큰 힘이 될 겁니다. 퇴직 후‘그만큼 일했으면 됐지 또 왜 일을 하려고 하느냐’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어요. 쉬면서 자기만족을 찾는 분도 있지만 나는 일하는 것 자체가 휴식이기도 하고 성취감과 만족감으로 삶의 에너지를 얻는 타입이에요. 은퇴를 하게되면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심리적인 압박을 받게 되는데 경제 활동도 하고 가치있는 일을 하면 좋잖아요. 물론 건강이 뒷받침돼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