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학산책] 한국문학의 국제적 위상을 위하여

입력 2016-06-17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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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 문학계의 핫 이슈는 크게 두 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작가 한강이 그녀의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 수상이라는 커다란 성취를 이룬 데 대한 축하의 분위기이고, 다른 하나는 국립한국문학관 건립을 둘러싼 이러저러한 논의의 분위기이다. 앞의 것은 쾌거에 비유되는 대외적 성과이고 뒤의 것은 여러 쟁점을 내포한 대내적 사업이지만, 둘의 공통점은 한국문학의 국제적 위상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하나씩 살펴보자.

한강에 관련한 개인적 정보나 수상의 조력자였던 번역자 데버러 스미스에 대한 기사는 그야말로 넘치고 넘쳤다. 수상작에 대한 수준 높은 리뷰도 제법 많이 등장했다. 잘 알려졌듯이, 이 작품은 채식주의자가 된 한 여자가 스스로 나무가 되어간다고 생각하면서 겪어가는 내면의 흐름을 담고 있다. 상처받은 영혼에 대한 위안과 공감의 친화력이 강렬한 데다 한강 특유의 점착력 있는 문장이 얹혀 소설을 끝까지 손에서 못 놓게 하는 힘이 있다.

물론 나는 한강의 대표작으로 이미 ‘희랍어 시간’과 ‘소년이 온다’라는 두 장편소설을 주목한 바 있다. 앞의 것이 언어를 잃어가는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 사이에 벌어지는 존재론적 드라마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보편적 차원을 호소했다면, 뒤의 것은 광주민주화운동 기간의 상황과 그에 대한 기억을 한편으로는 사실적 서사로, 또 한편으로는 숨죽이며 살아남은 자의 내면적 목소리로 어루만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수상작은 번역자의 선택에 의해 ‘채식주의자’로 향했다. 그것은 원저자인 한강 개인의 역량 못지않게 ‘영어 번역’이라는 과정과 결과가 중요했다는 점을 말해준다. 원래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은 비영어권 작품이 영국에서 영어로 번역 출간된 것에 대해 시상하되 번역자와 작가에게 같은 상금을 수여하고 동급의 예우를 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시상 시스템은 ‘보편언어로서의 영어’를 캐치프레이즈로 삼는 그레이트브리튼의 제국적 욕망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최초’를 유난히 호출하고 상찬하는 우리나라 특유의 호들갑은 여전히 문제적이었다. 이 ‘최초’의 사건 이전에도 한국문학은 씌어지고 읽혔을 테고, 수상 후 갑자기 한국문학의 수준이 높아진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어쨌든 이제 우리는 세계 언어로서의 영어의 힘을 실감했으니, 천천히 ‘번역’이라는 과정에 대한 연구와 토론을 겸허하게 시작해야 한다. 이때 우리는 데버러가 직역이 아닌 의역을 빈번하게 택했고, 심지어 오역이나 창의적 번역도 많았다는 일부 주장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고 한국어 원문에 충실한 번역보다는 영어 사용자가 수용했을 때 친숙하게 다가오는 ‘창작적 번역’이 훨씬 위력을 발휘한다는 번역관(觀)과 마주치게도 된다. 말하자면 이는 ‘문학으로서의 번역’을 생각해봐야 하고, 정확한 번역보다는 아름다운 번역을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기도 할 게다.

기왕 한강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가지만 더 말해보자. 한강은 원래 시를 썼다. 학창 시절 그녀는 소설가 한승원 선생의 딸로도 유명했지만, 언제나 잔잔하고 아름다운 필체로 원고지를 채워가던 ‘예비 시인’이었다. 그러던 중 1993년 계간 ‘문학과 사회’에 시가 당선됐고, 소설로는 그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붉은 닻’이 당선됐다. 그러니 습작 시절로 보나 등단 순서로 보나 ‘시인 한강’이 ‘소설가 한강’보다 먼저다. 등단 20년 만에 펴낸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문학과지성사, 2013)는, 비록 한강이 작가적 자의식을 소설 쪽에 내주었는지는 몰라도, ‘시인 한강’이 그 저류에 여전히 존재함을 알려주었다. ‘채식주의자’의 형상을 연상케 하는 다음 작품은 어떠한가.

푸르스름한/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한 백 년쯤/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내 몸이/커다란 항아리같이 깊어졌는데//혀와 입술을 기억해내고/나는 후회했다//알 것 같다//일어서면 다시 백 년쯤/볕 속을 걸어야 한다/거기 저녁 잎사귀//다른 빛으로 몸 뒤집는다 캄캄히/잠긴다

― ‘저녁 잎사귀’ 전문

한강에게는 이러한 ‘웅크림’과 ‘깊어짐’ 그리고 ‘캄캄히 잠김’이 있다. 그 침전(沈澱)의 힘으로 한강은 문학적 꿈을 꾸었고, 드디어 ‘아침’과 ‘볕 속’의 ‘다른 빛’으로 걸어갔다. 그러니 이번 수상을 두고 누가 ‘한강의 기적’이라고 비유한 것은 틀렸다. 자연스럽게 찾아온 한강 문학의 개화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다음으로 문학관 이야기를 해보자. 작년 말에 국립한국문학관 설립을 위한 ‘문학진흥법’ 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그러다가 4·13총선 일정에 따라 유보되었던 논의가 다시 활발해졌다. 더불어민주당 도종환 의원이 대표 발의한 이 법안은 문학진흥 관련 사업을 지원하고 문학 창작과 향유를 증진함으로써 문학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기본 계획은 5년 단위로 기획되었는데,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첫 분기 5년, 그 다음에 또 5년, 이렇게 하여 한 20, 30년을 내다보고 계획을 세운 법안이다.

이 법안에 의해 진척되어갈 일들을 단순한 행정 차원의 사업에 머무르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문인들이 직접 관심을 가지고 담론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토론회나 지면 등을 통해서 말이다. 행정 및 재정 지원, 제도적 지원 같은 부분은 국회나 정부에 맡기되, 그런 지원을 끌어낼 수 있도록 문학 내부에서 참신하고 역동적인 의견의 장을 펼쳐갔으면 좋겠다.

그 가운데 우리의 관심은 일본 도쿄나 중국 베이징, 대만 타이난(臺南)에 이미 오래전부터 운영 중인 국립문학관으로 향해 있다. 이러한 동아시아 주요 국가들이 이미 선례를 운영하고 있으니, 우리도 국립문학관을 통해 문학적 자산을 수집하고 전시하고 활용해 후세를 위한 교육 시설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이 법안의 핵심 내용이니까 말이다. 이는 한국문학을 관광 자원화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만듦으로써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문학관 운영 주체를 국가로 정함으로써 문학을 일종의 공공재 개념으로 해석하고 활용하자는 계획을 담고 있기도 하다. 최근 여러 지자체가 부지 선정 공모에 나서면서 건립의 첫 단추를 풀어나가는 순서를 밟고 있다. 곧 결과가 발표되면 바로 설계 용역이 하나 둘씩 배정되면서 확실하게 그 외관과 콘텐츠를 구체화해갈 것이다.

문학은 한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궁극적 대상으로 다룸으로써 이를 접하고 누리는 이들로 하여금 사회적 존재로 성장하게끔 하는 문화예술의 한 영역이다. 그 점에서 아무리 영상매체가 주도적 예술로 자리 잡아간다고 해도, 문학을 통해 경험과 생각을 계발해가는 과정은 전혀 손상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문학은 인간이 깊이 생각하고 사물을 인식하는 데 더없이 필요하며, 언어를 통해 감동과 사상을 키우는 데 변함없는 중심 역할을 할 것이다. 특별히 국가가 문학 창작과 번역과 연구와 향유의 저변 확대와 내실화를 위해 나서준다면, 개인 차원의 일로만 여겨졌던 문학의 순환 회로가 더욱 탄탄하고 견고한 공공 구조를 가지게 될 것이다. 여기에 기대가 크다.

어쨌든 한강의 수상과 그에 따른 한국 소설에 대한 많은 관심, 그리고 국립한국문학관 건립을 둘러싼 각계의 뜨거운 호응 등은 모두 한국문학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중요한 전기가 되어줄 것이다. 두루 한국문학의 융성을 위한 인프라가 갖추어지는 좋은 징후라 생각하면서, 열심히 한국문학을 응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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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 문학박사. 현재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며 한양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팔봉비평문학상, 김환태평론문학상 등 수상. 저서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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