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처럼 집에서 출근해 직장으로 간다는 개념은 확 바뀔 것이다. 집에서 일하는 재택근무, 사무실이 정해지지 않은 탄력적 근무가 확산될 것이다.”
세계적인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가 한 말입니다. 엊그제(현지시간 27일) 87세 일기로 영면에 들었죠. 그는 1980년 발간한 ‘제3의 물결’을 통해 20~30년 내 인류 사회가 제조업 기반에서 지식ㆍ데이터 중심으로 변모하는 정보화 혁명을 겪을 거라고 예견했습니다.
그로부터 36년이 흐른 지금, 그의 선견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로봇과 바둑을 두고, ICT(정보통신기술)로 치료를 받으며, 3D 프린터로 집을 만들어 삽니다. 정보화 혁명을 넘어 ‘제4의 물결’에 더 가까운 변화들이죠.
하지만 한국에서 유독 토플러의 말이 들어맞지 않는 분야가 있습니다. 바로 근무 환경입니다. 그는 21세기가 되면 공간과 시간의 제한이 허물어지면서 ‘텔레워크(telework)’가 대중화될 것이라고 내다봤지만, 우리는 오늘 아침도 좁아터진 지하철에 몸을 실어 출근했고 다람쥐 쳇바퀴가 끝나는 6시 퇴근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한국 기업들, 재택근무 도입률 3%.
IT 강국으로 평가받는 한국에서 재택근무를 도입한 회사는 100곳 중 3곳밖에 안 됩니다. 미국에선 도입률 80%가 넘는 탄력근무제(근로시간을 줄이는 것)를 활용 기업은 9%에 불과하고요. 근로자가 출ㆍ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시차출퇴근제도 13%에 그칩니다.
5년 전 정부가 저출산 해결을 위해 ‘스마트워크 활성화 전략’ 정책을 마련하며 유연근무제에 시동을 걸었지만, 좀체 속도가 나지 않네요. 기업들이 요지부동인 이유가 뭐냐고요? 소통이 어려운 데다가, 통제도 안 된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유연근무제를 원치 않는 동료 사이에 불신이 생길 수 있고요. 개인적인 측면에서도 가정과 일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정체성과 소속감을 잃으면서 사회적으로 고립될 수 있다는 것이죠. 이 때문에 야후의 최고경영자인 머리사 메이어(Marissa Mayer)는 3년 전 반대여론을 무릅쓰고 재택근무제를 폐지하기도 했습니다.
한국 기업들, 유연근무제 만족도 92%.
하지만 우려와 달리 유연근무제는 생산성에 큰 도움을 줍니다. 최근 대한상공회의소가 300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봤는데요. ‘일과 가정 양립에 보탬이 된다’고 말한 근로자 비율이 97%에 달했다고 합니다. 미생이니까 당연한 거 아니냐고요? 기업도 만족해하고 있습니다. 생산성이 늘고, 이직률이 줄었다는 대답이 92%였고요. 인재 확보에 도움이 됐다는 응답도 87%나 됐습니다.
올해 초 세계적인 경제지 포브스(Forbes)에 실린 설문조사도 비슷한 결과를 나타내고 있는데요. 재택근무자가 회사 근무자들보다 두 배 가까이 만족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델(Dell), 아이비엠(IBM), 오라클(Oracle) 등이 ‘풀타임 재택근무’를 도입할 때 ‘나 홀로 사무실’을 고집한 메이어 CEO는 지금쯤 후회하고 있겠죠? 쓰러져가는 ‘인터넷 공룡’을 살려내기엔 너무 늦은 거 같네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달 초 이투데이에 실린 이 기사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의 최대 자동차제조 업체 도요타가 8월부터 일주일에 단 2시간만 회사에서 근무하는 재택근무 시스템을 도입한다고 합니다. 본사 직원 7만2000명 가운데 인사ㆍ경리 등에 종사하는 2만5000명이 대상이라고 하네요.
일본의 3대 메가뱅크 중 하나인 미쓰비시도쿄UFJ은행의 4000명 직원 역시 내일(7월 1일)부터 집에서 일을 합니다. 보고는 이메일로, 회의는 화상으로 진행한다고 하네요. 36년 전 토플러가 말한 재택근무의 정의입니다.
“기업은 시속 100마일의 속도로 혁신에 혁신을 거듭한다. 하지만 정부와 관료조직은 30마일도 안 되는 속도로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다. 이런 속도의 차이는 상호 충돌을 일으키고, 발전의 흐름을 저해한다.”
토플러가 10년 저술한 ‘부의 미래’에 나오는 말입니다. 재세계화와 우주 공간으로의 도약이 ‘제4의 물결’을 몰고 올 거라 예고했죠. 그는 이 과정에서 세계 부(富)의 패권이 중국으로 이동할거라고 예견했습니다.
이미 일본은 변화의 일렁임에 몸을 실었고, 토플러가 부의 주도권을 잡을 거라 선견한 중국은 패들링(양팔을 이용해 파도를 잡는 것)을 시작했습니다. 기업과 정부의 속도가 뒤바뀐 한국은, 아직 제대로 된 첫발조차 내딛지 못했는데 말이죠.
IT강국 타이틀을 통해 ‘제3의 물결’에 완벽하게 올라탄 우리나라가 코앞까지 밀려 온 파도에 몸을 싣지 못한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합니다. “재택근무 안 한다고, 뭐 그 정도까지야”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만, 변화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빠르게 시작되니까요. 토플러의 말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