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외신기자협회 회원
백발에 신체가 단단해 보이는 설렌버거는 씩씩한 청년 같았는데, 미소와 함께 유머를 섞어가며 질문에 차분하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인자하면서도 엄숙한 표정에 준수한 모습의 그는 맑은 음성으로 자세하게 당시 얘기를 들려주면서 자신은 결코 영웅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사고 조사를 위한 청문회에 참석했던 소감은.
“청문회는 사고 5개월 후에 시작됐다. 그것에 대해 사람들이 잘 모르기 때문에 이 영화가 중요한 것이다. 청문회는 재판과도 같았다. 내 직업적 명성이 큰 위기에 처하긴 했지만 사고 경위를 알기 위해선 필요한 조치였다.”
△평소에도 위기에 처했을 때 침착하게 대처하는가.
“영화에서 위기에 매우 침착하게 대처하는 모습은 다소 과장된 것이다. 나와 부기장은 오랜 경험에 따라 본능적으로 대응했을 뿐이다. 조용하고 침착하게 승객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은 우리들의 책임이다. 실제로는 매우 긴장했다. 나는 사고 즉시 내 삶을 변화시킬 만큼 엄청난 위기라는 것을 이내 알았다. 그러나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은 방법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우리가 구출될 때까지 비행기가 강 위에 떠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비행기가 추락했을 때 살아남는 방법은 무엇인가.
“내 여객기는 추락한 게 아니라 물 위에 불시착한 것이다. 사람들은 나보고 비행기 어디에 앉아야 가장 안전하냐고 묻는데 사고마다 경우가 다르기 때문에 안전한 자리란 원래 없다. 중요한 것은 비상구와 탈출할 때 필요한 기구 등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또 그것을 열고 다루는 방법을 숙지하는 것이다. 짐은 남겨 두어야 한다. 짐 꺼내려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비행 중 기체가 요동을 하면 겁이 나는데 비행기가 흔들리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가.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한다. 조종사와 비행기는 기체의 흔들림을 다룰 수 있는 기술과 시스템이 있고 또 그런 것에 대비하도록 제작됐다. 잠시의 불편으로 생각하면 된다. 사실 승객석에 앉아 자동차를 타고 갈 때 느끼는 진동이 비행기가 흔들리는 것보다 더 심하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에 앉아 눈을 감고 진동을 느껴 보면 알 것이다. 평균적으로 비행기가 자동차보다 더 안전하다.”
△영화를 본 소감은.
“나와 가족의 삶을 스크린 위에서 본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경험이었다. 두 번 봤는데 처음 봤을 때 격한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톰이 내가 한 일을 하고 내가 한 말을 하는 것을 본다는 것은 초현실적인 경험으로 그는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나를 표현했다.”
△사고 후 첫 비행을 했을 때 불안했는가.
“그렇진 않았다. 정신적인 후유증에서 벗어나고 비행에 적응하도록 3개월간 푹 자면서 몸과 정신의 컨디션을 조절했다. 그러나 다시 비행을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다시 비행을 하고 싶었다. 재비행은 마치 집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편안했다. 오랫동안 공중에 뜬 비행기의 조종석에 앉아 내 삶을 보냈기 때문에 그 자리가 편안하다. 나는 비행을 사랑한다. 비행은 내 평생의 정열이다. 그러나 그 후 비행기를 조종하면서 새떼를 봤을 땐 신경이 쓰였다.”
△비행기의 허드슨 강 착륙 후 ‘설리 칵테일’이라는 것이 유행했는데 마셔 봤는가.
“마셔 봤다. 그레이 구스 보드카에 물을 조금 섞은 것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톰 행크스와 일한 소감은.
“강 위의 불시착 경험이야말로 초현실적이요, 흥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비행은 나와 우리 가족의 삶을 영원히 바꿔 놓았다. 따라서 그 일을 영화로 만드는 것 역시 초현실적인 경험이었다. 그들은 드림팀으로, 둘보다 더 나은 사람들은 없다. 난 늘 클린트와 톰의 영화를 좋아했다. 클린트는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한 후 날 찾아와 점심을 함께 먹으면서 3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그땐 배역도 결정되지 않았던 시기로 클린트는 나의 일상적인 삶을 보려고 내 집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톰이 내 역을 맡게 된 뒤 다시 집에 와 반나절을 함께 보냈다. 우리는 각본을 보면서 수정을 했고 내 경험을 가급적 진실하게 묘사하자는 데 동의했다. 난 영화에 지극히 만족한다. 세트에도 가 봤는데 정말 훌륭하더라.”
△그 경험을 책으로 쓴 이유는.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그 얘기를 쓴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그 경험을 추스르면서 그 과정을 나의 한 부분으로 만들고 싶었다. 사고에 대해 얘기하고 쓰고 생각한다는 것은 내게 카타르시스 같은 구실을 했다.”
△당신의 직업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1980년 2월부터 파일로트로 일했다. 파일로트란 천직으로 여겨야 하는 직업이다. 우리의 첫 번째 임무는 승객들의 안전이라고 난 늘 동료 파일로트들에게 강조한다. 사고가 난 내 비행기가 무사히 강 위에 내린 다음에 내가 승객 수를 센 것도 이 같은 책임감 때문이다. 모든 승객이 안전한 것을 확인하기 전에는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사고가 났을 때 즉각적으로 느낀 점은 무엇인가.
“먼저 내가 침착성을 찾고 승객들에게도 침착하도록 종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나와 부조종사는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어 우리가 먼저 침착해야 했다. 그러나 사고 직후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이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비슷한 경험을 한 다른 파일로트들도 다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42년 동안 비행을 하면서 이런 도전을 받아 보긴 처음이었다. 그 다음에 생각난 것은 비행기가 온전히 육지에 착륙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난 내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한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빨리 생각해낸 것이 강 위에 내리는 것이었다. 비행기는 훼손돼도 승객은 무사할 수가 있다고 확신했다.”
△새떼와 비행기가 충돌하는 경우가 잦은가.
“그렇진 않다. 충돌해도 보통 한두 마리 정도인데 내 경우는 특별한 것이다. 우리와 충돌한 것은 수십 마리의 몸체가 큰 캐나다 거위들로, 비행기 전체와 충돌했고 그중 두 마리 정도가 양쪽 엔진 속으로 들어갔다. 비행기는 물 위에 30분 정도 떠 있었다. 구출은 20분도 채 안 걸렸다.”
△사고 후 조종사 훈련 과정에 바뀐 점이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없다.”
△아직도 여객기를 모는가.
“사고 1년 후 은퇴하고 지금은 개인 취미용 비행기를 조종한다. 또 혼자 재미로 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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