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필
박 대통령은 청와대 비선실세라는 최순실 씨의 국정 개입 의혹이 비등점을 향해 치닫고 있는 국면에서, 이에 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은 채 개헌을 부르짖었다. 그동안 경계해온 블랙홀을 스스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김재원 정무수석은 대통령이 추석 연휴 마지막 날 개헌 준비를 지시했다고 설명했지만, 그 말이 맞다 해도 개헌 발언의 시점은 납득하기 어렵다. ‘박근혜 개헌이 아니라 최순실 개헌’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개헌은 필요하다. 다만 누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추진하는 게 최선인가, 1987년 당시와 너무도 상황이 판이한 지금 정치권의 합의가 가능하겠는가가 초점이었다. 개헌 논의는 정교하고 신중하게 전개돼야 하며 불순한 사적 동기나 정쟁 차원의 추진을 경계해야 할 국가 중대사다.
그런데 대통령이 개헌 제안을 한 날, 그동안 최순실 씨가 대통령의 연설문과 ‘국무회의 말씀자료’ 등을 미리 받아봤다는 보도가 터져나왔다. 최 씨의 자료에는 청와대 비서진 개편과 같은 인사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정황도 담겨 있다. 최 씨의 PC에 국정의 중심 청와대가 들어 있었던 셈이다. 그의 대통령 연설문 개입설에 대해 청와대 비서실장은 “봉건시대에도 없는 얘기”라고 강력 부인했는데,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대통령이 자주 경고한 대로, 이거야말로 국기문란사태가 아닌가.
최 씨 딸의 학사의혹에 대해 한 이화여대생이 쓴 대자보 ‘어디에선가 말을 타고 있을 너에게’는 여러 사람의 찬탄을 받았다. 이 학생은 정유라 씨에게 보낸 글에서 “누군가는 네가 부모를 잘 만났다고 하더라. 근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정당한 노력을 비웃는 편법과 그에 익숙해짐에 따라 자연스레 얻어진 무능. 그게 어떻게 좋고 부러운 건지 나는 모르겠다”고 썼다. 그리고 정당한 노력이 얼마나 빛나는지 알게 돼 고맙다며 자신이 훨씬 당당하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글을 읽고 이 진흙탕 같은 사회에서 그래도 청년들은 멋지게 성장하고 있다며 안도했다. 그러면서 그들이 정정당당하게 경쟁하고 마음껏 능력을 펼치게 해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고 가슴 아파했다.
서울지하철 전동차에는 한동안 ‘불법이라뇨 불통입니다’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누가 봐도 박 대통령이 분명한 옆얼굴이 그려진 그 포스터가 강조한 것은 빨갛게 표시된 귀마개였다. 아주 인상적이고 예술적으로도 성취도가 높은 의사표현물이었다.
그 불통의 귀마개를 보면서 ‘이게 보청기라면 좋을 텐데’ 하는 헛된 생각을 해봤다. 우리의 젊은이들과 시민들은 이미 이렇게 세련돼 있고, 투쟁 가운데서도 유머와 여유를 살릴 정도로 세상이 달라졌지만 박 대통령과 정부는 달라지거나 나아지는 게 없다.
농민 백남기 씨의 죽음에 대해서도, 최순실 의혹과 기업의 팔을 비틀어 급조한 미르·K스포츠재단에 대해서도 대통령은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처럼 외면해왔다. 이화여대생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대통령은 국민들이 모르는 어디에선가 대통령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은 국민의 대통령이 아니라 최순실의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탄핵론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모든 의혹에 대해서 대통령은 솔직하고 정확하게 밝혀야 한다. 그리고 개헌 논의에서는 빠져야 한다. 임기 내 개헌을 완수한다는 목표로 정국을 주도하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개헌의 순수성과 절박성을 훼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