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필
생각해 보니 그녀는 내가 아는 언론인의 부인이다. 함께 소속된 단체에서 매년 두 차례 봄가을로 가는 소풍과 회식에서 수시로 만났던 여성이다. 지난달 말 1박 2일 소풍을 갔을 때 “요즘 유명해져서 아주 좋겠다”고 했더니 안 그래도 이름이 싫어져 어릴 때 부르던 ‘미자’로 개명해야겠다고 답했다.
최순실 씨가 영국에서 갑자기 귀국했다는 뉴스가 알려졌을 때, 우리는 “이제 진짜 최순실이 왔으니 가짜는 끝장났다”고 또 놀려먹었다.
최순실 씨의 경우 원래 이름은 畢女(필녀)였는데 순실(順實)로 바꿨다가 2014년 2월 다시 서원(瑞原?)으로 고쳤다. 필녀의 ‘畢’은 끝낸다는 뜻이니 아마도 그 아버지 최태민 씨가 딸을 그만 낳으려고 지은 이름 같다.
어쨌든 순실은 얼마나 서민적이고 좋은 이름인가. 연실이 탄실이 미실이와 같은 이름은 길자 미자 신자 영자 정자와 달리 정감이 가는 순수한 우리 이름이다. 順은 순응하고 순조롭고 유순하고 도리에 따르고 안락하다는 뜻을 갖춘 글자다. 實에는 열매, 바탕, 본질, 튼튼하다, 책임을 다하다, 실제로 행하다 이런 뜻이 있다.
실 자가 들어가서 나쁜 말은 거의 없다. 무실(務實) 성실 신실 적실(的實, 適實) 정실(正實, 精實) 착실 충실 행실(行實)…. 게다가 봄의 꽃과 가을 열매라는 뜻인 춘화추실(春華秋實)은 문화(文華)와 덕행(德行), 즉 외적 아름다음과 내적 충실을 고루 갖춘 사람을 형용하는 말이다.
이런 좋은 이름을 버린 최순실 씨는 순과 실의 반대인 역(逆)과 허(虛)로 국정을 농단하고 사적 이익을 챙겨 사람들에게 ‘순실증’이라는 마음 전염병까지 퍼뜨렸으니 그 죄를 뭘로 다 갚을까. 순실증은 성실하게 법을 지키며 생업에 충실히 살아왔는데 갑자기 허탈해지고 의욕이 없어지는 증세다. 처음엔 분노를 느끼다가 ‘내가 이러려고 ○○○을(를) 했나’ 하고 스스로 한심스러워하는 병이어서 치유가 쉽지 않다.
명심보감에 ‘순천자(順天者)는 흥(興)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늘의 뜻을 따르면 성공하고 거역하면 망한다는데, 최 씨는 스스로 망하는 길에 들어선 셈이다.
공자가 이름을 바르게 하는 것[正名]이 정치라고 했건만 박근혜 대통령은 그러기는커녕 ‘길라임’이라는 가명으로 차움의원 VIP시설을 이용했다. TV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여주인공 길라임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당차게 살아가는 대역배우인데, 극중에서 남주인공 ‘김주원’과 영혼이 바뀌기도 한다. 왜 하필 대역배우의 이름을 골랐을까. 참 기묘하고 얄궂다.
더 기묘하고 얄궂은 것은 사람들이 검찰에만 가면 성실해지는 것이다. “성실하게 조사받고 답변하겠다”는 말은 누가 맨 처음 창안했을까. 박 대통령도 대국민담화에서 “저 역시 검찰조사에 성실하게 임할 각오이며…”라고 말했다. 그럴 때만 획일적으로 성실해지지 말고 평소 성실한 마음과 순실한 자세로 살면 좀 좋았겠나? 그러지 않았으니 확실한 단죄가 필요해진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