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케네디-박정희 모두 1917년생, 그들은 지금의 역사를 어떻게 볼까
나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처음 미국엘 갔다. 지금부터 10년 전쯤 미국 동부 워싱턴디씨와 뉴욕에서 소박한 강연 일정을 가질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천공항을 떠나 일본 도쿄에 들러 나는 일본의 평론가 아이사와 가쿠(愛澤革) 선생을 처음 만났고, 그분과 함께 다시 비행기에 올라 미국을 향했다. 그때 아이사와 선생은 내게 송우혜 원작의 ‘윤동주 평전’을 번역하는 중이라고 인사를 하였다. 아이사와 선생은 2009년 일역(日譯)을 완성하여 후지와라(藤原)서점에서 두툼하게 책을 출간하였고, 내게도 우정의 표시로 책을 보내주었다. 그 책을 받는 순간, 나는 아이사와 선생이 원저자인 송우혜 선생께 보냈다는 편지의 한 구절을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저는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윤동주의 시와 그 생애를 제대로 생각하기를 계속하면 거기에는 역사와 인간에 관한 중요하고 의미 깊은 과제가 잇달아 드러나는 것을 알게 되겠다.’ 그런 의미에서 윤동주는 많은 사람들이 각각 자기의 참다운 생각을 따져야 하는 씨름판(말을 바꾸면 매체)이라고도 할 수 있고, 이렇게 해서 윤동주를 둘러싸고 사람들 각각의 참된 목소리가 서로 메아리치는 판을 이룰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송우혜 선생의 ‘윤동주 평전’은 제가 생각을 진전시키려 할 때 늘 그 위치를 확인하기 위한, 없으면 안 되는 등대입니다.”
또 다른 1917년생
그런데 도착한 다음 날 강연을 앞둔 오후에 그곳 교포 문인 한 분이 앨링턴 묘지를 가보자고 했다. 나로서는 특별히 존 F. 케네디가 재클린과 함께 누워 있을 묘역을 육안으로 보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다다른 깊숙한 곳에 케네디 부부가 누워 있고, 그 묘석에는 케네디의 생몰 연도인 ‘1917~1963’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두루 알려져 있듯이, 케네디는 1963년 11월 22일 링컨 컨티넨털을 타고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퍼레이드를 하다가 정오 무렵 오스월드라는 사내가 쏜 총을 맞고 죽음을 맞았다. 케네디는 부인 재클린이 보는 앞에서 머리에 총을 맞고 죽었던 것이다. 케네디 암살범으로 기소된 오스월드는 그해 11월 24일 아침 텍사스 경찰서 지하에서 잭 루비라는 나이트클럽 경영자의 총에 맞아 암살되었다.
그래서 이 사건은 마피아 소행이라는 설, CIA의 공작이라는 설, 소련이 배후에 있다는 설 등이 떠돌다가 한 광신자의 단독 범행으로 결론이 났다. 그때 재클린은 남편의 피로 얼룩진 옷을 그대로 입은 채 그 옆을 지켰고, 미국은 이 잔혹한 살인에 대해 전례가 없는 추모 열기를 보였다. 존의 장례식은 11월 25일 앨링턴 묘지에서 엄수되었고, 그는 그렇게 미국의 영원한 ‘젊은 심장’으로 남았다. 그의 나이 마흔일곱이었다.
그때 나는 1990년대 초 케네디 암살 사건을 다룬 올리버 스톤의 영화 ‘JFK’를 떠올리고 있었다.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한 이 영화는, 케네디의 죽음을 둘러싼 정치적 맥락을 그 이후 터진 베트남전과 연루하여 해석하였다. 영화는 케네디가 죽지 않았더라면 베트남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고, 결국 케네디의 죽음은 군수산업과 관련 있는 자들의 이해관계가 반영되어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남겼다.
그 영화의 여운이 남아 있던 터라, 존과 재클린의 묘역은 내게 커다란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정작 내게 그 순간 꽂힌 것은, 묘석에 새겨진 ‘1917~1963’이라는 숫자였다. 그날 저녁 강연할 윤동주와 케네디가 동갑이었기 때문이다. ‘아, 이들이 같은 1917년생 뱀띠로구나!’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또 한 사람의 1917년생
바로 그때 나는 또 한 사람의 1917년생을 생각했다. 어릴 적, 케네디와 동갑으로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1961년 군사정변 직후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백악관을 방문하여 케네디를 만났다. 마흔다섯의 젊은 두 정상이 회담을 가진 것이다. 박정희는 1963년에 창당된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총재에 추대되었고, 그해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윤보선을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이 되었다. 여론의 격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제 발전에 필요한 외자 확보를 위해 한일협정에 조인하였고, 1965년 국회 비준을 거쳐 한일 간 국교를 정상화하였으며, 베트남전쟁 파병을 단행하였다.
한일국교 정상화와 베트남전쟁 파병은 거센 여론의 비판을 받았으나 그는 그것을 뚫고 나갔다. 이를 통해 얻은 경제 성과는 보릿고개라는 절대빈곤으로부터의 탈출이었으며, 지금도 이는 그의 대표적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유신시대를 열어 장기집권에 들어섰고, 새마을운동과 녹화사업을 주도하였고, 아내 육영수 여사의 죽음을 경험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부마사태 수습책을 둘러싼 차지철과 김재규 사이의 언쟁 도중 김재규에게 권총으로 피격당해 죽음을 맞았다. 18년 동안의 철권통치가 원치 않은 비극으로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는 그렇게 ‘1917~1979’의 길지 않은 생을 마쳤다. 그의 나이 예순셋이었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
나는 그날 강연 주제를, 그냥 ‘윤동주’에서 ‘윤동주와 케네디와 박정희’로 바꾸었다. 동갑내기 세 사람을 통해, ‘삶/죽음/역사’를 이어볼 생각이 순간적으로 든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들 셋의 공통점은 출생 연도뿐만 아니라, 각기 맞은 비극적 죽음에도 있었다. 윤동주의 죽음에는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지배해온 폭력의 역사가 어른거리고, 케네디의 죽음에는 전쟁을 통해 부(富)를 축적해온 검은손들이 저지른 폭력의 역사가 착색되어 있고, 박정희의 죽음에는 권력과 탈권력의 갈등 관계 혹은 독재의 비극이라는 근대사의 한계가 묻어 있었다. 결국 그날 저녁 나는 ‘윤동주의 시(詩)’에서 주제를 한국과 동아시아와 세계의 역사로 아득하게 확장하였고, ‘삶/죽음’, ‘전쟁/평화’, ‘권력/민주주의’ 같은 고전적 명제에 대한 사유도 서투르게나마 곁들일 수 있었다.
내년이면 우리는 윤동주와 박정희와 케네디의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윤동주는 지금 소녀상이나 위안부 협정이 주는 여전한 제국의 그림자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케네디는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이 몰고 올 ‘미국 우선주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박정희는 딸의 저 벼랑 끝 위기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윤동주의 시가 다시 한 번 귀를 울린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 ‘쉽게 씌어진 詩’ 마지막 두 연
과연 윤동주가 기다리던 ‘시대처럼 올 아침’은 눈물과 위안으로 우리를 찾아올까? ‘JFK’에서 짐 개리슨 검사가 사자후를 토하는 마지막 대사가 떠오른다. “우리는 어릴 때 ‘정의’라고 하면 배운 말이 있죠. ‘정의는 언제나 승리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죠. 정의는 늘 권력으로부터 심한 위협을 받기 때문에 권력과 싸우는 게 힘들죠.” 정의와 권력의 화두가 급류처럼 흘러가는 지금, 다시 한 번 1917년생 동갑내기 윤동주와 케네디와 박정희의 너무도 달랐던 삶과 죽음을 생각해본다. 이들의 탄생 100주년은 과연 어떻게 찾아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