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 인준 가능성 10%도 안된다고 생각했지만…‘이래가지고 되겠느냐’ 고함 치고 싶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표결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이제 관심사는 탄핵안의 국회 통과 이후 ‘대통령 권한대행’을 누가 하느냐다. 이 시점에서 다시 주목받는 인물이 있다. 김병준 국무총리 내정자다. 정치권은 탄핵 올인 기조에 밀려 새 총리 추천에 대한 논의가 멈춘 상태다. 여야 합의로 새 총리를 세우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황교안 총리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는 박근혜 정부의 연장선상에 있어 야권이 반대하고 있다.
김 총리 내정자는 여전히 어정쩡한 상태에 있다. 이른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꽉 막힌 정국만큼이나 김 내정자의 심경도 답답하다. 그는 난파된 박근혜호의 표류를 막을 마지막 선장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지명 이후 근 한 달 가까이 손발이 묶이면서 “불편하고 무거우며 복잡한 심정”일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다섯 차례의 촛불 집회를 지켜보며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며 ‘시민 중심의 공동체가 이끄는 대한민국의 희망’을 이야기했다.
△최근 청와대와 오고간 이야기가 있나.
“총리 지명을 받고 난 이후 청와대와 별도로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다. 사실은 많은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해야 하는데, 지금 입장이 서로 난감하다. 마치 청와대하고 협의를 하면서 행동하는 것처럼 비쳐질 수 있다는 점도 조심스럽다. 현재 정국이 교착상태이다 보니, 실무적으로도 크게 협의할 부분은 없는 상황이다.”
△총리 지명 전 박 대통령과 독대했다고 밝혔는데, 박 대통령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지난달 29일 박 대통령을 뵙고 난 뒤, 그 다음주 수요일인 이달 2일에 지명 발표가 났다. 그 사이에 어떤 형태로든 직·간접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총리의 역할과 권한, 박 대통령에 대한 검찰수사 문제 등에 관한 것이었다. 그 이후에도 의견 교환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현재도 내정자 신분 그대로인 건가. 여야가 합의하면 총리로 추대될 수 있지 않나.
“맞다. 내정자 지위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박 대통령께서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추대한 총리를 받겠다고 했는데, 여기엔 당연히 내정자까지 포함돼 있다고 본다. 여야 합의 총리가 추천되면 제 지위는 자연스럽게 소멸되는 게 이치였는데, 야당 쪽에서 거부했다. 지금은 청와대가 여야 합의 총리를 추천해도 안 받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당초 박 대통령으로부터 책임총리 권한 보장을 받았을 텐데….
“여야가 총리 추천 문제를 놓고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점은 실기를 한 거다. 그때 사실 합의를 봤으면 총리 문제에 있어 박 대통령이 약속을 했으니 안 받을 수 없었는데, 박 대통령이 국회에 가서 여야 합의로 총리를 요청했을 때는 탄핵소추를 받아도 좋다는 입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탄핵 바람이 일면서 여야 합의 총리를 안 받겠다고 입장을 바꾼 것이다.”
△내정 발표 이후 첫 기자간담회에서 울먹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어떤 심정이었나.
“왜 그런 상황이 연출됐는지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이랬던 거 같다. 처음 총리 제의를 받았을 때는 거절하려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총리 인준이 될 가능성은 10%도 안 된다고 스스로 판단했다. 박 대통령께도 소위 김병준 카드로는 정국을 뚫지 못한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박 대통령이 ‘그럼 정부는 대체 어떻게 되겠느냐’고 하더라. 그래서 받아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나라가 아픈데도 정부가 아무런 조치도 못하는 현실이 답답했다. 예전에 미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괴감도 들었다. 그래서 세상에 대고 ‘이래 가지고 되겠느냐’고 고함이라고 한 번 치고 싶었다. 내가 돌팔이 의사라도 의사가 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직을 떠난 지 10년 가까이 지나면서 잊은 줄 알았는데 새롭게 사명감 같은 것이 북받친 게 아닌가 싶다. 오히려 10년간 더 많이 쌓였는지도 모르겠다.”
△최순실 게이트로 국정 공백이 커지고 있다. 이 사태를 빠르게 수습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은 무엇이라고 보나.
“지금 이 상황은 혹독하지만 미래 발전을 위한 전환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 매주 토요일마다 집회를 지켜보면서 난 희망을 본다. 일본이 ‘명치유신(메이지 유신)’을 통해 사회를 개혁했다는 점이 참 부러웠는데, 우리 국민들도 새로운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어수선한 정국 수습을 위해선 세 개의 길(트랙)을 동시에 가야 한다. 하나는 검증되지 않은 인물들이 어떻게 국정을 좌지우지했는지에 대해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선택지는 ‘하야’나 ‘탄핵’ 둘뿐이다. 두 번째는 책임을 묻더라도 국가는 정상적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빨리 대통령을 대신할 수 있는 총리를 뽑아서 국정을 챙기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민적 에너지를 모아 우리의 미래를 개헌까지 포함해서 설계해야 한다. 다만 개헌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 탄핵의 동력이 떨어질 수 있으므로 개헌은 시민사회나 학계의 몫으로 돌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총리는 새로운 총리가 임명되는 게 맞다. 박 대통령으로부터 에너지를 받는 황 총리 체제는 이미 고장나 동력을 잃은 상태다. 여, 야, 시민사회 인사가 참여하는 거국 중립내각만이 난국 돌파의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유일호든, 임종룡이든 경제 컨트롤타워 복원부터 나서라는 목소리도 높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정치권에선 힘 못 쓰는 황교안 총리 체제를 유지하는 게 정국 주도권을 쥐는 데 더 유리하다는 생각에서 황 총리 체제로 반사이익을 보겠다는 몽니를 부리고 있다. 하지만 다음 내각은 반드시 힘을 가져야 한다. 황 총리 체제로 국정이 운영되더라도 황 총리가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불안한 경제를 바로 세우기 위해선 경제부총리가 리더십을 갖고 움직일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빨리 청문회를 진행시켜 임종룡 내정자를 경제수장 자리에 앉히든가, 그렇지 못하다면 유일호 부총리라도 국회에 불러 힘을 실어주겠다는 의사라도 표시해야 한다.”
△최순실 사태를 통해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개헌에 대한 입장은.
“한국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은 대통령의 책임과 권한이 불일치하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모든 대통령이 만신창이가 돼 청와대를 떠났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내각제’다. 내각제는 권한을 행사하는 만큼 책임져야 하는 구조이다. 이원집정부제든, 내각제든 내각제적 요소가 크게 강화돼야 한다. 물론 내각제가 되면 경제권력이 정치권력을 포획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는 집단소송제 강화, 소액주주 권한확대, 기업의 회계 투명성 제고 등을 통해 시장과 소비자가 대기업(대자본)을 통제할 수 있는 장치를 갖춰나가면 된다.
△야권이 최순실 사태와 촛불 민심을 대선과 연결시키다 보니 돌파구를 못 찾고 있다는 시각도 있는데.
“국민들이 촛불집회에서 지르는 함성은 단순히 야당에 대한 지지가 아니다. 현 정국에 대한 분노다. 국민들은 다만 스스로 답을 내지는 못하고 있다. 때문에 정치권이 빨리 대안을 내야 한다. 야구에도 일반관중이 있고 프로가 있듯 정치판에도 일반관중(국민)은 흥분하고 비난할 수 있지만, 프로(정치인)는 선수가 공을 잘치고 잘 받도록 해야 한다. 국민들이 의견을 제대로 낼 수 있도록 그 기반을 정치인들이 잡아줘야 한다”
△최순실 사태가 향후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나.
“정치권은 제대로 파악을 못하고 있지만 촛불 집회를 통해 이미 시민들의 자치 역량이 얼마나 큰지가 증명됐다. 이러한 결집된 에너지를 흡수한다면 현재의 국가주의적인 사고, 즉 모든 것을 국가가 컨트롤하는 틀에서 벗어나 공동체 중심의, 시민 스스로가 규율해 갈 수 있는 사회로 한발 전진할 수 있다. 평소에도 늘 이야기하지만 이제는 국가의 역할을 줄이고 시장과 공동체 역할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권에서 김 내정자의 역할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있던데, 향후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뚜렷하게 뭘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다. 다만 국가에 도움이 되고 또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나름대로 찾아야 하지 않나 싶다. 하나 분명한 건 이편저편, 소위 진영논리 속에 갇히고 싶지 않다. 내가 원하는 건 우리 사회 전체의 담론의 수준과 정치 역량이 한 단계 높아지는 것이지 어느 한쪽이 우세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