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10. 임윤지당

입력 2016-12-14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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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자식·양자의 죽음…성리학으로 ‘사회적 유전자’를 남기다

‘바람의 딸’로 잘 알려진 한비야 씨는 2007년에 ‘열아홉 살 청춘들’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내 자식을 낳기 힘들게 됐지만 물리적 유전자 대신 사회적 유전자를 남기고 싶어!”(한겨레신문)

가부장제가 공고하던 18세기 ‘사회적 유전자’를 남긴 여성이 있으니 그 이름은 임윤지당(1721~1793)이다.

윤지당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성리학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으로 이름을 날린 오빠 임성주였다. ‘윤지당’이라는 당호도 임성주가 지어준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는 관학(官學) 교육이 유명무실화되면서 양반집에서는 독선생을 초빙해 자녀 교육을 했다. 그러자 여성도 혼인하기 전에 남자형제와 함께 공부할 기회를 얻었고 윤지당도 그랬다. 동생 임정주는 회고에 “누님은 형님에게서 공부를 배웠다”고 썼다.

윤지당은 열아홉에 자신보다 한 살 적은 원주의 선비 신광유와 혼인했다. 그런데 혼인한 지 8년 만에 남편이 죽고 어렵게 얻은 아이마저 일찍 죽고 말았다. 남편도 피붙이도 없는 윤지당은 시동생들과 함께 살았다. 나이 마흔이 넘어 시동생 신광우의 큰아들을 양자로 입양했으나 그 양자마저 스물여덟에 죽고 말았다. 윤지당은 “아마도 내가 죽어야만 이 비통이 사라질 것이다”라면서 절망스러운 심정을 토해냈다.

혼인 후 계속 불행한 일을 겪은 윤지당에게 학문은 고단한 삶을 유지하는 버팀목이었다. 윤지당은 가혹한 운명에 대해 “이는 나로 하여금 마음을 분발케 하고 인고의 성품을 길러 부족한 점을 증대하려 하심이 아닐까?”라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울퉁불퉁한 삶이 학문의 길로 나아가는 자양분이 된 것이다.

윤지당은 “어릴 때부터 성리(性理)의 학문이 있음을 알았다. 조금 자라서는 고기 맛이 입을 즐겁게 하듯이 학문을 좋아해 그만두려 해도 할 수 없었다”면서 성리학을 탐구했다. 그리고 예순다섯이 되던 해에 본인 원고를 동생에게 보냈다. 비록 식견이 천박하고 문장도 엉성하지만 본인의 글이 장독이나 덮는 종이가 된다면 비감한 일이 될 것이라며 책으로 엮기를 당당히 밝혔다. 그 바람대로 그 글들은 그녀가 작고한 지 3년 후인 1796년에 ‘윤지당유고’로 간행되었다.

흥미롭게도 이 책에는 시(詩)가 한 편도 없다. 그 대신에 ‘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 ‘극기복례위인설(克己復禮爲仁說’ 같은 성리학에 관한 독창적인 논문이나 여성 전기, 성현의 인물론, 발문(跋文), 제문(祭文) 등 남성의 글짓기 영역으로 알려진 주제로 가득하다. 윤지당은 ‘천륜’을 다하지 못한 대신 사회적 유전자를 남겼다. 윤지당의 글은 퍼져나갔고, 같은 길을 가고자 하는 후배 여성들에게 걷고 싶은 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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