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 극복 중심은 기업
1997년 12월 3일. 이날은 한국 경제의 ‘국치일(國恥日)’이다. 아직도 우리 국민들은 당시 임창열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이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에서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옆에 앉아 침통한 표정으로 구제금융안에 서명하는 모습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17년. 경제위기의 공포는 또다시 엄습해 오고 있다. 지난해 말 불거진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이로 인한 탄핵 정국에 경제 현안 처리가 멈춘 현 상황은 20년 전 외환위기에서 가까스로 일어선 기업들에게 큰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시장에선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에 이어, 올해 다시 한 번 경제위기가 초래될 것이라는, 일명 ‘10년 주기설’이 빠르게 회자되고 있다.
한국 경제의 주력인 재계는 탄핵 정국과 맞물려 리더십 공백 상태다. 각 그룹과 하부 기업들은 대형 투자에 대한 결정을 미루고 있고, 치열한 시장 경쟁에서 앞설 수 있는 승리 전략도 마련하지 못했다. 여기에 기업인은 탐욕의 대상으로 낙인 찍혀 공격 대상이 됐다. 어딜 둘러봐도 기업 입장에서는 암초 투성이다.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한국 경제의 분위기는 성장 전략에서 위기관리 전략으로 위축됐다. 그러나 한국 경제 회생의 ‘골든 타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기업들이 ‘시련→도전→극복’의 기적의 공식을 만들 때다. 기업의 기를 살려야 하는 이유가 그곳에 있다. 기업이 뛰어야 경제가 선순환되고 나라가 살아난다.
◇정치적리스크, 숨쉬기 조차 힘든 韓 기업 = 지난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의 본질적인 이유는 국정공백 등 정치적 요인이었다. 원인의 핵심이 시장과 기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와 관료들에게 있었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최근 우리나라가 탄핵정국에 들어서면서 구조조정과 구조개혁 등 주요 현안 과제가 올스톱되고, 관료들의 복지부동 등 국정 공백이 현실화되고 있다”면서 “1997년, 그리고 2008년과 같은 경제위기가 초래되지 않을지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그는 1997년 외환위기 발발 전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인 김현철 사태와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과정을 국정공백 상황으로 인지했다. 이번 최순실 게이트도 위기를 증폭시킬 요인으로 지목한 것이다.
기업의 의욕이 지금처럼 움츠린 상황에서는 강소국(强小國)에 대한 꿈 역시 멀어진다는 게 대체적인 인식이다. 그간 우리 경제는 서서히 성장 동력을 잃어갔다. 2014년 3.3%였던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2.6%에 그칠 전망이다. 내년 상황은 더욱 암울하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내년 성장률(전망치)을 2.7%에서 2.4%로 내려 잡았다. 정치 리스크와 대외변수까지 반영될 경우 1%대로 떨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난해 법정관리를 받고 있는 기업은 1150곳으로 집계됐다. 이는 사상 최대 규모다. 법정관리 신청기업은 조선, 해운, 건설 등에서 전자·통신, 유통·패션·식음료 등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5년 내 법정관리기업이 2000개까지 불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기업 경쟁력이 곧 국가경쟁력… 정치논리 배제해야 = 우리 기업들은 불과 7~8년 전 세계의 찬사를 받은 경험이 있다. 선진국은 물론 러시아·브라질·인도 등 성장 잠재력이 큰 국가조차 모조리 고꾸라지던 시절, 우리 기업들은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위기 국면을 탈출했다.
조선·반도체·철강·자동차가 수출을 주도한 가운데 한국은 1996년 선진국 그룹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2009년엔 OECD 산하 개발원조위원회(DAC)에 가입했다. 원조를 받던 최빈국이 공여국이 된 것은 한국이 유일하다. 2010년에는 주요 20개국(G20) 의장국으로 서울에서 정상회의를 열어 선진국과 신흥국 사이 이견을 좁히는 중간자 역할을 자임했다.
한국은 선진국 문턱에 서 있는 국가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산업 성장의 한계 △저출산ㆍ고령화 현상 지속 △재정 적자 심화 △경제성장률 저하 △심각한 사회 갈등 등으로 새로운 위기를 맞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비관에 빠질 것이 아니라 산업구조를 과감히 개편하고, 해외에서 성장동력을 확보한다면 다시 한 번 도약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재계 한 관계자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치논리를 배제하고 구조조정과 신성장산업육성에 주력해야 한다”면서 “경제 정책의 핵심을 기업에 맞춘다면 일자리 창출도 일어나 경제가 선순환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