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그런데 말입니다. “가화만사성? 웃기네, 좋아하네. 바랄 걸 바라라”며 새해 벽두, 우리의 오래된, 해묵은, 거족적 바람을 무협지 장풍보다 더 센 콧바람으로 날려 버리려는 사람들이 있네요. 그것도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 근사한 미술관에서 전시회라는 형식을 빌려서 말이지요.
장영혜라는 ‘웹 아티스트(Web Artist - 이건 또 뭐냐?)’가 신랑인 마크 보주와 함께 서울 종로구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지난 6일 시작한 웹 아트 형식의 전시회가 그러하다고 합니다. ‘세 개의 쉬운 비디오 자습서로 보는 삶’이라는 이름의 이 전시회는 가정·경제·정치 세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데, 이 두 아티스트는 ‘불행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다’며 만 가지 행복의 기반인 가정을 무참히 박살내고 있다네요.
한 신문이 보도한 ‘가정’에 대한 전시회 내용을 전해 드리겠어요.(‘경제’와 ‘정치’는 오늘 제 글의 주제가 아니므로 생략합니다.) “새해를 맞아 모처럼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지만 단란함과는 거리가 멀다. 다 큰 형제의 대화에는 서로의 약점에 대한 공격과 욕설이 난무한다. 아이들이 키우는 개는 그 와중에 자꾸 식탁에 올라온다. 은유로든 직유로든 그야말로 ‘개판’인 가족이다.”
어떤가요? “가화를 이룬 집은 몇 집이며, 개판 아닌 집은 몇 집이나 되겠니?”라고 묻는 것 같지 않나요? 아티스트들이 말이죠. 이런 의문 때문에 막장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었던 새해 첫 아침부터 대판 싸우는 가족의 모습을 드라마에서 탈출시켜 버젓한 전시 공간의 한 자리에 내놓은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오래된 진실이라면서 말이에요.
‘불행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다’는 말은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 첫 줄을 비튼 겁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는 이 문장은 미국의 도서·출판 단체인 ‘아메리칸 북 리뷰’가 ‘세계 100대 소설 첫 문장’ 가운데 6위로 뽑기도 했지요. 이 ‘명문장’의 뜻은, 아마도, ‘한 가정이 행복하려면 수없이 많은 조건이 다 충족되어야 하며, 그중 하나만 부족해도 불행해진다’라는 것이지 싶습니다.
‘불행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다’라는 비틀기는 ‘불행한 가정이 불행한 이유는 제각각일지라도 겉모습은 똑같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인 것 같은데, 영국 소설가 살만 루슈디는 이 두 아티스트보다 먼저 이런 비틀기를 보여주었답니다.
‘조지프 앤턴’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에서 루슈디 역시 안나 카레니나의 첫 줄을 슬쩍 비친 후 “사람들은 대문을 닫아걸고 그 속의 사사로운 세계, 즉 가족의 세계에 틀어박힌다. …. 그러나 내심 누구나 알고 있듯이 집 안에서 벌어지는 일 치고 평범한 일은 드물다. 오히려 난장판이라는 말이 더 정확할 때가 많다. 사람들은 다혈질 아버지를, 주정뱅이 어머니를, 신경질적인 형제자매를, 정신 나간 이모를, 난봉꾼 삼촌을, 노망난 조부모를 상대해야 한다”고 서술하고 “가정은 우리 사회의 든든한 반석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괴롭히는 온갖 어려움의 원천이며 캄캄한 혼란의 도가니이다. 평범하기는커녕 초현실적이고, 순조롭기는커녕 파란만장하고, 예사롭기는커녕 기상천외하다”고 마무리했어요.
예전 인도에서 성장했던 루슈디도 우리처럼 어릴 때 ‘대가족 제도’를 경험했던 모양이에요. 그렇지 않고서야 가족 간의 갈등과 반목을 이렇게 상세히 적어내릴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대가족에게만, 또 명절에만 이런 번잡함이 있겠어요? 아이가 하나 혹은 둘 있는 요즘 대부분의 가정, 아니 부부만 있는 가정에도 무시로 이런 불화가 생기지 않나요? 이런 세상이니 ‘가화만사성? 바랄 걸 바라라’는 비웃음을 비웃어서는 안 되지 싶네요.
하긴 쉬울 것 같으면 ‘가화만사성’이 수백 년 동안 새해 덕담으로 전해 내려왔겠어요? 괴테가 한 말로 전해지는 “왕이건, 농부건 가정이 평화로우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다”는 경구는 가정의 평화가 절대 쉽지 않음을 알려주며, “행복한 가정은 천국의 첫 관문”이라는 버나드 쇼의 경구도 가정의 평화를 이루기가 천국 들어가기만큼 지난(至難)함을 전제한 것 아닌가요?
이런 경구들을 보면 “나는 네 집에 화평을 주러 온 게 아니다. 아비와 아들, 어미와 딸을 싸움 붙이기 위해 왔다”고 하신 복음서의 예수님 말씀에 “안 그래도 우리는 이미 싸우고 있거든요”라고 비틀어진 대답을 하고 싶어집니다.
‘가화만사성’은 ‘명심보감(明心寶鑑)’에 나옵니다. 거기에서 이르는 방법이 있긴 하지요. ‘인내’와 ‘용서’가 그것인데, 그 길이 어렵고 어려우니 선인들이 보감에 편입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