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총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장관
임영신은 1899년 전북 금산(현재는 충남)에서 12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전주 기전여학교에 입학한 뒤 ‘공주회’라는 비밀결사대를 조직해 독립을 모의했다. 3·1운동 때 기전여학교 교사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했다. 만세 시위에 참여하다가 경찰에 체포돼 투옥되었고, 극심한 물고문과 폭력을 당했다. 재판에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 뒤 일본 히로시마여자전문학교(廣島女子專門學校)에 편입해 공부했고, 2년 뒤 귀국하여 공주 영명(永明)학교의 교사로 재직했다. 1924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사우스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926년 석사학위를 마친 뒤 이승만이 불러 워싱턴에 가서 그를 도왔다.
이 시절 이승만이 임영신에게 호감을 느껴 청혼했던 일은 유명하다. 이승만은 그때 이미 유부남이었을 뿐만 아니라 50세였기 때문에 임영신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에 대한 애정과 신뢰는 컸다. 그 뒤 이승만을 기리는 마음에서 이승만의 ‘승(承)’을 따서 자신의 호를 ‘승당(承堂)’으로 지었다.
1933년 귀국한 뒤 교육사업에 매진했다. 흑석동 땅을 사서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해 운영했다. 중앙대학교의 전신인 이 학교는 보모 양성을 위한 전문교육 기관이었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뒤 조선의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했다. 이때 임영신은 중앙보육학원을 철도학교로 사용하도록 했다.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에 이름을 올렸고, 1942년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의 지도위원이 되었다.
광복 후 조선여자국민당(대한여자국민당)을 만들어 우익계 여성운동을 주도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상공부 장관이 되었다. 결혼한 여성은 금치산자처럼 취급되어 남편의 허락 없이 독립적으로 법률 행위를 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여성이 초대 내각의 장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대통령 이승만의 지원을 빼놓고서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공금 유용과 횡령 혐의로 기소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밀수업체와 적산불하(敵産拂下) 브로커에게서 뇌물을 받았으며, 대통령 이승만의 생일 선물을 마련하려고 거액을 모금하도록 지시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판결은 무죄였지만 결국 장관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 뒤 1949년 경북 안동 보궐선거에 대한여자국민당 후보로 출마해 제헌의원에 당선되었다. 1950년 2대 총선에서도 금산에서 당선되었다. 1953년에는 중앙대학교 초대 총장, 5·16 후에는 민주공화당 중앙위원과 대한부인회 회장을 지냈다. 1977년 승당 임영신, 미국 이름 루이스 임(Louise Yim)은 ‘여성 최초’라는 수많은 수식어를 남긴 채 유명을 달리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