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103. 정정화(鄭靖和)

입력 2017-04-27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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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넘나들며 臨政 안살림 맡은 독립운동가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정정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살림꾼, 정정화(鄭靖和·1900~1991)는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로 손색이 없다. 그의 일대기 ‘녹두꽃’은 여성 독립운동사 연구에 한 이정표(里程標)가 된다.

서울에서 출생한 그는 충남 예산의 대지주 집안 출신인 아버지가 공부를 반대하는 바람에 오빠의 어깨너머로 천자문, 소학 등을 어려서부터 다 익힌 총명한 소녀였다. 1910년 11세에 안동 김씨의 명문가 김가진(金嘉鎭)의 맏아들이자 동갑인 의한과 혼인한 뒤 신학문도 배웠다.

1919년 3월 만세운동 직후 시아버지가 대동단(大同團) 총재를 맡아 남편과 먼저 상하이로 가 독립운동에 투신하자 정정화도 뒤이어 망명하였다. 1930년까지 임시정부의 재정을 지원하기 위하여 10여 년간 6회에 걸쳐 국내로 밀파되었다. 일제의 삼엄한 경계 속에 살얼음판보다 더 위험한 일, 상하이와 국내의 비밀 연락을 도맡다시피 한 셈이었다. 그는 담대한 용기와 지혜로 충실히 임무를 감당할 수 있었다.

망명 생활 27년 동안 자신의 가족은 물론 이동녕, 김구 등 임정 요인과 가족들의 삶이 그의 손에 달렸다 할 만큼 부지런히 알뜰히 돌보고 보살폈다. 1932년 윤봉길의 홍커우(虹口)공원 의거 후, 임정이 저장성(浙江省) 자싱(嘉興)으로 이동한 뒤에도 그의 살림살이는 계속되었다.

1934년 지방행정관이 된 남편을 따라 장시(江西)성에도 잠시 머물렀으나, 이듬해 곧 임정의 한국국민당에 가입, 공식적인 단체활동에 뛰어들었다. 1940년 충칭(重慶)의 한국독립당 광복군 창립에 남편과 같이 참여하였으며,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조직하여 간사를 맡아 활동하면서 독립운동가 자녀들을 위한 3·1유치원 교사도 하는 등 안팎으로 눈부신 활동을 펼쳤다.

1943년 2월 대한애국부인회 재건대회에서 훈련부 주임으로 “국내외 부녀는 총단결하여 전민족해방운동과 남녀평등이 실현되는 민주주의 신공화국 건설에 적극 참가하여 분투하자”는 강령을 선포하였다. 방송을 통하여 국내외 동포여성들의 각성과 협력을 촉구하고, 위문 금품을 거두어 일선에서 싸우는 독립군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포로수용소를 통하여 넘어오는 동포 여성들을 계몽, 교육하는 등 잠시도 몸을 아끼지 않았다. 멀리는 미주 한국여성단체들과 긴밀한 연계 속에 재미동포들의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 성원도 촉구하였다.

결국 그는 좁게는 한 독립운동가 가족의 일원으로, 넓게는 임정 관련 요인들과 가족, 나아가 임정의 일원으로 항일투쟁 독립을 위해 자신을 불살랐다. 1991년 귀천하기까지 그의 투철한 애족·애국정신은 자녀와 후손, 후배 여성들에게 귀감이 되어 새겨지고 이어지고 있다 하겠다. 198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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