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남북경협 재개’ 움직임… 개성공단기업협회 “하루라도 빨리
“이 생활이 벌써 1년 넘었습니다. 6월에는 어떻게 해서든 (개성)공단에 다시 가야합니다. 장마가 오기 전에 공장도 살펴봐야하고, 장비나 기계도 점검해야 하고…. 솔직히 지금 간다고 해도 상황이 많이 안 좋겠지만요.”
늦은 밤. 번화가 커피 전문점에서 마주 앉은 그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분노와 푸념, 기대와 절망을 반복해서 드러냈다. 그는 2007년 큰 꿈을 안고 개성공단에 입주했던 중소기업 대표 박 모씨다.
정부는 지난달 28일 개성공단 전면 중단에 따른 입주기업 피해를 전액 보상한다고 밝혔다. 5·24조치와 금강산관광 중단으로 피해를 본 남북 경협기업에 대해서도 피해 보상을 추진하기로 했다. 서류 등을 통해 확인된 피해는 모두 보상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피해 기업은 매일 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
◇“1년이 넘도록 하루하루 피가 말랐다”=절박함이 가득했던 박 대표는 패션업계에서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납품 방식의 중소기업을 이끌었다. 그는 “개성공단에 입주한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고 후회했다.
연 매출 100억 원이 넘던 그의 회사는 2007년 개성공단 2차 입주기업이 됐다. 남북경협 사업이었고 정부가 인정한 공단이니 아무 의심 없이 안심했다. 때마침 베트남 직원들의 근무태도에 지쳐있던 때였다. 느닷없이 회사를 그만두거나 명절 보너스만 챙기고 말도 없이 퇴사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개성공단은 그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공단에서 막상 사업을 시작해보니 북측 직원들의 숙련도도 뛰어났다. 획일화된 문화에 익숙해 퇴사나 이탈도 없었다. 마음의 거리가 멀었을 뿐, 물리적 거리는 가까웠다. 아침에 공단으로 출근하고 저녁에 완제품을 싣고 나오기도 했다. 밤새 부산으로 달려가면 다음날 아침, 수출 선박에 제품을 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2월 갑작스런 공단 폐쇄 결정이 내려진 후 그의 인생은 180도 달라졌다. 하루하루가 힘겨웠고 가만히 앉아서 재가동 시점만을 기다려야 했다. 그는 지난 시간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지옥이다”라고 말했다.
◇얼굴색 바꾼 은행…8억 대출에 月이자 823만 원=개성공단에 입주했던 패러글라이더 전문기업인 ‘진글라이더’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이 회사는 전세계 글라이더 시장 1위, 점유율 60%를 차지해온 우리 기업이다. 그러나 지난 1년여 동안 너무 많은 변화를 겪어야 했다. 송진석 대표는 지금도 공단 폐쇄 당시 상황을 잊을 수 없다.
“패러글라이딩 산업은 3월부터 성수기입니다.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갖춘, 획기적인 신제품을 개발해서 이제 막 출시하려던 참이었어요. 2월 설날 연휴가 끝나면 출고하려고 원자재와 완제품을 가득 쌓아놨는데 갑자기 ‘2시간 안에 모두 나가라’는 통보를 받고 서둘러 빠져나왔습니다.”
개성공단이 입주를 시작하면서 송 대표는 기존 중국 사업장을 30% 수준으로 줄였다. 나머지 생산라인을 개성공단으로 옮겼다.
입주 당시 토지공사에서 공단부지 약 3000평을 분양받았다. 땅을 매입하고 공장을 세우는데 35억 원을 투자했다. 여기에 10억 원을 더 들여 생산설비도 새로 들여놓았다. 한때 공장 근로자는 남북한을 합쳐 230여 명이나 됐다.
하지만 공단이 폐쇄돼고 1년이 넘는 동안 손실은 300억 원을 넘어섰다. 60여개국에 수출할 만큼 시장에서 인정 받는 회사였지만 납품시기를 놓치면서 영업손실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무엇보다 세계 1등이라는 브랜드 가치 하락이 가장 안타까웠다. 수치로 따질 수 없는 손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당장 직원들 월급은 챙겨야 했다. 서둘러 은행 대출을 알아보니 또 한번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한때 ‘개성공단 입주기업’이라는 타이틀은 은행권에서 하나의 신용장이었다. 대출은 물론 만기 연장도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공단 폐쇄 이후 가장 먼저 얼굴색을 바꾼 곳이 은행이었다.
“당장 회사 문을 닫을 수 없으니 은행 대출을 알아봤습니다. 우리은행에서 8억 원을 대출 받았는데 매달 이자만 823만 원을 내라고 합니다. 이럴 때는 국책은행이 나서서 낮은 이율로 입주기업을 살려주면 좋을텐데….”그는 12% 수준의 대출이자를 감당하며 공단 재개일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3% 수준으로 추락한 매출, 그래도 희망이 생겼다=그나마 동남아시아와 중국 등에 사업장을 두고 있는 기업들은 사정이 나은 편. 기존 사업장을 모두 정리하고 개성공단에 100% 주력한 기업들은 피해가 막심하다.
전체 입주기업 124곳 가운데 49개사(40%)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 가운데 10여곳은 매출이 90%이상 폭락해 근근이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지금까지 정부지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지난해 4월 실태조사 후 정부가 확인하고 인정한 피해규모만도 7000억 원을 넘는다. 그럼에도 보상은 절반도 이뤄지지 않았다.
피해는 고정자산과 유동자산으로 나눠 보상했다. 고정자산은 남북경협보험금으로 충당했다. 이조차 전체 손실액의 90%만 보상한다. 그나마 상한선이 70억 원에 막혀있어 100억 원 넘게 손해본 기업은 고스란히 피해를 떠안았다. 70억 원은 개성공단이 재가동하면 모두 상환해야하는 대출 성격의 보상금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교류에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통일부 직원들 응대 태도부터 달라졌다는 걸 실감한다는 게 입주기업 대표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경기도 안산에 본사를 둔 개성공단 입주기업 대표는 “불과 몇달 전과 비교해도 통일부 직원들의 태도부터 달라졌다”며 "지금까지 힘들었지만 조금 더 버텨볼만한 힘이 생겼다"고 말했다.
개성공단입주기업협의회 김서진 상무도 공단 재가동을 손꼽아 기다려온 인물이다. 그는 이 달 안에 방북신청을 낼 예정이라고 했다.
“작년에도 방북신청을 세 번 냈습니다. 사실 실제 방북보다 정부 지원을 이끌어내려는 항의성 신청이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사정이 다릅니다. 우리는 꼭 개성에 다시 가야합니다. 갈 수 있는 희망도 생겼고요.”
북핵문제와 유엔 안보리의 제제 문제를 풀어야 하지만 이 모두 풀어내기까지 입주기업들은 버틸 여력이 없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며 조심스러운 제안도 내놨다.
“북한의 비핵화는 물론 안보리 제재도 풀어야할 숙제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모두 해결한 뒤에 개성공단을 가동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정부가 부담이겠지만 이런 현안을 풀면서 동시에 공단을 단계적으로 재가동하는 일종의 ‘투트랙’ 전략이 나와야 합니다. 가능성이 열린 만큼 정부가 문제해결을 위한 지혜를 발휘해 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