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139. 김학순(金學順)

입력 2017-06-23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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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 첫 공개 증언

김학순(金學順)은 199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한 여성이다. 그녀의 증언은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와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김학순은 1924년 만주 지린(吉林)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학순이 백일도 되기 전에 사망했다. 어머니는 어린 딸을 데리고 평양에 돌아와 살다가 재혼했다. 김학순은 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아지자 14세에 기생집 수양딸로 가게 되었다. 1941년 17세에 양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갔다. 신의주를 거쳐 산하이관(山海關)을 지나 베이징(北京)에 도착했다. 어느 식당에서 나오다가 군인들에게 강제로 끌려 트럭에 태워졌다.

다음 날 도착한 곳에서 김학순은 강간을 당했다. 그 뒤 만난 조선 여성들에게 “여기서 도망치기는 글렀다”는 말을 들었다. 함께 ‘위안부’ 생활을 했던 5명은 열아홉 살부터 스물두 살의 조선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일본 이름으로 불렸다. 김학순도 ‘아이코’라는 새 이름을 받았다.

군인은 주로 오후에 왔고, 여러 날 토벌을 나갔다가 돌아오면 하루에 7~8명이 오기도 했다. 얌전하게 있다가 가는 군인도 있었고, 거친 요구를 하는 군인도 있었다. 반항을 하면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두 달 뒤 새로운 곳으로 옮긴 다음에는 군인의 횡포가 더 심했다. 김학순은 사는 게 너무 비참해서 탈출을 결심했다.

어느 날 일본군이 토벌하러 나간 사이에 조선인 남자가 왔다. 김학순은 그에게 가다가 죽어도 좋고 중간에 내버려도 좋으니 제발 데리고 나가달라고 애원했다. 탈출은 성공했다. 새벽 두세 시쯤 빈 몸으로 위안소를 빠져나왔다.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 출신으로 중국어와 일본어에 능통했던 남자는 중국 각지를 다니며 장사를 했다. 김학순은 그를 따라다니다가 상하이(上海) 프랑스 조계지에 정착했다. 1943년 19세 되던 해에 딸을 낳았고, 1945년 21세에 아들을 낳았다. 부부는 전당포를 운영하며 그리 어렵지 않게 살았다.

1946년 6월 한국 땅을 밟았다. 거처가 마땅치 않아 장충단 수용소에서 지내다가 큰딸이 콜레라에 걸려 죽었다. 한국전쟁 때 남편이 사고로 사망했고, 그 뒤 초등학교 4학년이던 아들마저 물놀이를 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온갖 궂은일을 하며 어렵게 살다가 우연히 원폭 피해자를 만나 억울한 경험을 함께 이야기했다. 1990년 6월 일본은 ‘위안부’ 문제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기사를 보고 자신이 당한 일을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마침내 1991년 8월 14일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에 대해 증언했다. 그 뒤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97년 12월 평생 모은 약 2000만 원을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기부한 뒤 눈을 감았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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