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부모와 남편 잃고 50여년간 수절
절부(節婦) 조씨(曹氏)는 수령현(遂寧縣·전남 장흥) 사람이다. 1270년 삼별초(三別抄)가 강화도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당시 조씨는 여섯 살이었다. 아버지인 대위(隊尉) 조자비(曹子丕)는 지모가 있고 힘이 세 삼별초군이 특별히 별장(別將)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조자비는 탈출하여 개경으로 돌아왔으며, 이후 관군에 소속되었다. 조자비는 삼별초군을 진압하려 탐라까지 갔다가 1271년 겨울에 전사하였다.
조씨는 열세 살에 대위(隊尉)인 한보(韓甫)와 혼인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1281년 여름에 시아버지인 수령궁녹사(壽寧宮錄事) 한광수(韓光秀)가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에 참여하였다가 군중에서 죽었다. 남편 한보는 그녀가 27세 때인 1291년 여름, 합단(合丹)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과부가 된 조씨는 언니에게 의탁하였다가 딸이 혼인을 하자 딸과 함께 살았다. 그러나 딸이 1남1녀를 낳고 일찍 죽으니, 다시 손녀에게 의지하여 살았다.
조씨는 군인의 딸, 군인의 아내로서 27세 이전에 아버지와 시아버지, 남편을 연이어 전쟁으로 잃고 과부로서 50여 년을 살았다. 밤낮으로 여공(女工)을 부지런히 하여 딸과 손자·손녀를 먹이고 입히어 그들로 하여금 의지할 곳을 잃지 않게 하였고, 손님 접대와 혼사·장례·제사에 쓰는 경비를 마련하였다.
고려 말의 대학자였던 이곡(李穀)은 조씨의 손녀사위와 인연이 있어 조씨의 전기를 자신의 문집에 기록하였다. 기록 당시 그녀의 나이가 77세였는데도 건강하고 기억력이 좋아서 적들 속에 있을 때의 상황 등을 빠짐없이 얘기하여 주었다 한다.
이곡이 그녀의 전기를 쓴 이유는 그녀 삶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조씨는 50여 년을 수절한 절부이지만 조정에서 포상을 받은 것이 없다. 물론 고려시대에도 절부는 효자와 순손(順孫·부모가 일찍 죽어 조부모를 극진히 모시는 손주), 의부(義夫·부인이 죽은 뒤 재혼하지 않고 가정을 돌보는 남자)와 함께 포상되었다. 국가에서 베푸는 잔치에 초대받고, 물품도 상으로 받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고려 왕조는 여성에게 수절을 강요하지 않았다. 수절은 남편이 죽어도 그에 대한 정절을 계속하여 다른 데 시집가지 않는 것이다. 이게 소위 ‘삼종지도(三從之道)’, ‘일부종사(一夫從死)’ 이데올로기인데, 이는 유교에서 강조하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기본적인 사회 윤리였고, 불교에서는 남편 사후까지 정절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재혼녀를 왕비로 삼을 만큼 일부종사가 강요되지 않았던 것이 고려시대인 것이다. 때문에 절부 포상도 그렇게 빈번히, 빠짐없이 잘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다.
이곡은 그녀에 대해 “어려서 과부가 되어 절개를 지키고 늙기에 이르렀는데, 관가에서 구제하여 주지도 않고 사람들도 알아주지 않았으니, 슬프다. 오직 하늘의 이치가 어긋나지 않았으니, 마땅히 그는 건강하여 오래 장수하게 된 것이었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