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 최초로 비구니가 된 태종의 후궁
의빈 권씨(懿嬪權氏)는 예조판서 권홍(權弘)의 딸로, 태종의 후궁이다. 조선 왕실 내에서 내명부 직첩을 가진 인물 가운데 최초로 비구니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생몰년은 미상이다.
권씨는 1402년(태종 2) 태종의 후궁 중에서도 처음으로 정식 절차를 거쳐 후궁으로 봉해졌다. 태종은 애초에 권씨와 가례(嘉禮)를 거행하려 하였으나 원경왕후의 반대로 예식은 무산되었다. 권씨는 후궁이 된 직후 정의궁주(貞懿宮主)로 봉해졌다가 1422년(세종 4) 의빈으로 봉해졌다. 태종은 대궐 북쪽에 누각을 짓고 누각 앞에 연못을 파 주었다. 의빈은 슬하에 정혜옹주(貞惠翁主) 하나만 두었으나, 운성군 박종우에게 시집간 지 5년 만에 요절하였다.
1422년(세종 4)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권씨는 곧바로 비구니가 되었다. 조선 초에 내명부에 소속된 여성 가운데 최초로 비구니가 된 경우였다. 그 뒤 후궁들의 집단 출가가 잇따르자 당시 의빈의 출가는 조정 신료들로부터 큰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선왕 붕어 직후 후궁들의 출가는 연산군 대까지 이어졌다.
권씨는 비구니가 된 후 자신의 궁을 불당으로 개조하고 조석으로 염불을 하고 예불을 올리며 살아갔다. 비록 비구니가 되었지만, 내명부 직첩을 유지하며 별궁에서 살아갔다. 권씨가 살던 궁은 원래 의빈궁(懿嬪宮)이라 불렸는데, 뒤에 영수궁(寧壽宮)으로 개칭되었다. 1441년(세종 23)에 정인지가 “의빈이 머리를 깎고 중의 옷을 입고 있으니 이를 옛 모습으로 돌아오게 하라”고 상소를 올렸지만, 세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권씨는 소헌왕후가 죽은 뒤 세종의 부탁을 받고 금성대군을 친히 길렀다. 남양주 수종사에는 의빈의 딸인 정혜옹주의 부도탑이 남아 있는데, 이는 금성대군의 시주로 조성된 것이다. 정혜옹주는 금성대군이 태어나기도 전에 사망했으므로 둘 사이에 직접적인 인연은 없었다. 하지만 정혜옹주의 생모인 권씨가 자신을 친아들처럼 길러준 것에 보답하기 위해 정혜옹주 부도탑의 화주(化主)로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단종 대에 이르러 금성대군이 권씨가 나이가 많고 병이 들었으니 자신의 사저에서 모시며 봉양하게 해달라고 청을 올렸으나 단종은 궁중의 예법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윤허하지 않았다. 그 후 의빈궁에 머무르며 계속 출가 비구니로 살아갔다.
조선 초에는 경순공주와 소도군부인 심씨 등 여러 왕실 여성들이 출가하였지만 이들 대부분은 남편이 역적으로 몰려 사사된 경우 정업원을 은신처로 삼아 출가한 경우에 해당되었다. 하지만 의빈 권씨의 출가는 조정 신료들과 임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권씨의 출가에 이어 태종의 후궁들이 집단적으로 출가를 하고, 세종과 문종, 세조, 성종의 후궁들도 내명부에 적을 두고 있음에도 출가를 한 것은 조선 초 왕실 내의 불교 신앙이 매우 깊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