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 행정정책학부 교수, 전 청와대 정책실장
여야 국회의원까지 포함된 작지 않은 규모의 유치단이었는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대기업 회장 한 분이 일정 부분 이 유치단과 동행하게 되어 있었다. “왜 이렇게 했느냐”고 물었더니 이를 기획한 직원이 말했다. 가 보면 그 이유를 안다고.
정말 그랬다. 첫 방문 국가에 도착하는 순간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그 나라 총리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이 대기업 회장만을 모시는 것 같았다. 국제행사 건도 유치단장의 이야기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가 이야기해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 국가도, 또 그다음 국가도 마찬가지였다.
예정된 일정이 끝날 무렵 누군가가 인접 국가 한 곳을 더 방문하자고 했다. 하지만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그 나라 최고 지도자를 만나는 일은 하루 이틀 만에 성사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 그 회장이 입을 열었다. 자신이 좀 알아봐도 되겠느냐고.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그로부터 전갈이 왔다. 모레 오후에 만나기로 했다고.
한편으로 뿌듯했다. 우리 기업들이 이 정도로 성장했구나.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그가 없이 유치단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이 깊어졌다. 일이 잘 풀려 좋기는 한데, 이들 기업이 이렇게 나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행사 유치가 그 기업에 도움이 되어서? 글쎄, 그럴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지지를 부탁하는 과정에서 상대 국가와 그 관련 인사들에게 여러 가지 부담되는 약속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뭘까? 그냥 애국심에서? 이것 또한 글쎄, 쉽게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았다.
그러면 뭘까? 금융 지원이나 인·허가 등 정부로부터 무슨 특권이나 특혜를 받기 위해서? 예전에야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청와대 행정관이 기업에 전화 한 통만 해도 정경유착이다 뭐다 하며 ‘게이트’로 번지는 세상이다. 그런 걸 기대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두려움! 바로 그것 같았다. 툭하면 횡령과 배임 등 걸면 안 걸리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넓게 적용되는 그런 죄, 그리고 그런 죄 위에 서슬 퍼런 칼을 휘두르는 국가, 바로 이런 것이 이들로 하여금 국가권력의 눈치를 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종의 ‘보험’으로 이런 일에도 앞장을 서는 것이고.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바로 이 두려움에 올라타 이들을 앞세우고 있는 것 아닌가. 국가가, 또 국가 권한을 행사하는 정부 인사가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음 날 또 다른 나라로 향하는 일행과 떨어져 귀국 길에 올랐다. 순방 결과는 좋았지만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때의 그 기분 때문일까? 전혀 다르고 훨씬 더 큰 행사인 평창 동계올림픽을 보며 그때의 일이 생각났다. 우리 모두 다 안다.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삼성이 어떤 일을 했는지, 또 다른 기업들이 어떤 기여들을 했는지. 이들이 무엇 때문에 그리했을까? 국가권력이 무서워 ‘보험’ 들 듯한 일이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과거와 달리 이제 이 보험은 제대로 된 보험이 아니다. 반드시 지불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 하루 전, 검찰이 ‘다스’ 문제와 관련하여 삼성전자를 압수수색했다. 동계올림픽 유치의 일등공신을 말이다.
이제 기업들도 안다. 이 보험이 불량보험인지를.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이를 거부하지 못한다. 국가권력의 칼이 선별적으로, 아니면 비합리적으로 행사될 수 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삼성에 대한 압수수색을 보고도 보험에 들 이유가 없음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큰 보험에 들어야 하는 것쯤으로 생각하게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어찌해야 이 비정상적인 구조를 고칠 수 있을까? 동계올림픽 성화 뒤에 우리 모두가 풀어야 할 또 하나의 숙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