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 행정정책학부 교수, 전 청와대 정책실장
특정 장면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경우도 적지 않다. 머릿속 깊은 곳 어딘가에 박혀 있다가 적절한 때 다시 떠올라 기분을 바꾸어준다. 자못 심각한 문제나 상황 앞에서도 마음의 여유를 되찾게 해 주기도 하고.
예를 하나 들어볼까. 어느 미국 코미디언이 총기 규제가 아니라 총알 가격을 규제해야 한다고 너스레를 떠는 장면이다. “총알 하나에 5000달러! 그러면 이러겠지. 네 놈 죽이는 데 5000달러나 들어? 내가 미쳤니. 너한테 그런 돈을 쓰게… 아니면 이러지 않을까. 야, 적금 탈 때까지 기다려. 그때 총알 사서 다시 올게.” 표정도 어투도 웃을 수밖에 없는 장면, 정부 규제 이야기만 나오면 웃음을 짓게 한다.
그런데 요즘의 우리 코미디는 그리 즐겁지 않다. 보더라도 ‘다시 보기’를 해서 보고, 그러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코너는 건너뛴다. 이를테면 사람 몸을 소재로 하거나, 차고 때리면서 웃기려는 코너 등은 보지 않는다.
우선 몸을 소재로 하는 것부터 그렇다. 살찌고 키 작고 못생긴 사람들은 사람도 아닌 것처럼 취급된다. 뚱뚱한 사람은 먹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되고, 못생긴 사람은 이성(異性) 근처에도 가서는 안 되는 혐오스러운 사람이 된다. 폭력, 그것도 아주 고약한 폭력이다. 소재가 빈약하고 아이디어가 없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걸 코미디의 주류로 만들고 있을까.
밀고 때리고 차고 하는 것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정말 애들이 볼까 겁난다. 언젠가 특정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이런 장면들이 얼마나 많은지 세어 보았다. 많은 경우 1회 방송에 무려 수십 번, 거의 1~2분에 한 번꼴이었다.
코미디는 코미디로 봐 주면 된다고? 그렇지 않다. ‘5000달러짜리 총알’ 이야기처럼 이런 장면들 또한 우리의 기억 속에 각인된다. 그러면서 알게 모르게 일상 생활 속의 크고 작은 폭력들을 아무것도 아닌 양 방관하게 만든다. 또 더 나아가 자신이 행하는 폭력을 있을 수 있는 일로 여기게 만든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달리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몸에 대한 잘못된 문화와 관행, 그리고 습관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코미디가 만들어지고, 그걸 보며 우리 모두 웃고 박수치고 하는 것이다.
‘미투’로 연일 드러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추악한 모습들, 성추행과 성폭행은 이런 문화와 관행, 그리고 습관과 아무 관계가 없을까. 결국은 사람의 몸과 관련된 것이다. 다른 사람의 몸을 존중하는 문화가 있고, 남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있는 상황이라면 뭐가 달라도 다르지 않았을까.
이런 점에 있어 우리 모두가 죄인이다. 사람의 몸을 웃음의 재료로 삼고, 사람 몸에 손대는 것을 별것 아닌 양 여기는 주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또 이런 잘못을 고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이를 보고 웃고 즐기며 방관하고 있는 것도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대학원 시절 교수와 학생들이 야유회를 갔다. 노래자랑을 하는데 사회를 보는 학생이 다른 학생 몇 명의 몸을 가지고 농담을 했다. 이를테면 뚱뚱한 학생이 조금 늦게 앞으로 나오자 먹는 속도는 어떤데 몸 움직이는 속도는 어떻다 놀리기도 하고, 윗옷을 벗겨 배를 내어 보이기도 했다.
대학원장이 일어섰다. 그리고 마이크를 잡았다. “왜 남의 몸을 가지고 조크를 하느냐. 몸은 인격의 실체이다. 다른 사람의 몸은 머리카락 하나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악수 하나도 예의를 갖춰 하라고 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지성이다. 이러지 마라.”
야유회의 흥은 깨졌지만 그로 인해 더 기억에 남는 말씀이 되었다. 그 말씀을 새기며 다시 한번 말한다. 남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지 말자. 상대가 동성(同性)이건, 이성(異性)이건. 또 힘이 있는 사람이건, 힘이 없는 사람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