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응백의 해산물기행] (1) 영덕대게

입력 2018-03-30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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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삼척·울진 모두 제 고장 게 최고라지만…우열 없는 붉은 맛

▲위는 홍게, 아래는 영덕게.

목은 이색이 그리워한 맛

▲하응백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소장
공자께서는 “군자는 도를 추구하지 먹을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君子謀道不謀食, ‘논어’]라고 하셨지만, 군자도 맛있는 것 앞에는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왕왕 있다.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외가에서 태어난 목은 이색(李穡,1328∼1396)은 ‘잔생(殘生)’이란 시에서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입과 배만 생각하니[殘生唯口腹]/먹을 것만 찾는다는 평을 매양 받을밖에[謀食每遭譏]/서해의 등 푸른 생선이야 얼마든지 구하지만[西海靑魚賤]/동해의 대게는 어찌나 맛보기 힘드는지[東溟紫蟹稀, 번역은 이상현]”라고 하며 대게의 맛을 그리워했다. 이색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릴 적 외가에서 먹었던 대게의 맛을 잊지 못했던 것이다.

대게의 본고장은 어디인가

허균(許筠, 1569~1618) 역시 16, 17세기의 별미음식을 소개한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대게[紫蟹]의 맛을 상찬했다. 허균은 전라도 함열로 유배를 가서 그때까지 맛본 맛있는 음식을 추억하며 “삼척에서 나는 것은 크기가 강아지만하여 그 다리가 큰 대[竹]만하다. 맛이 달고 포(脯)를 만들어 먹어도 좋다”고 입맛을 다셨던 것이다. 허균이 삼척부사를 지냈고, 때문에 그 지역에서 잡힌 대게 중에서도 가장 크고 맛있는 녀석을 드셨을 것이니, 그렇게 말했을 법도 하다.

한자로 ‘붉은 게[紫蟹]’로 표기한 대게는 지금의 대게와 홍게를 모두 포함한 명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예부터 대게의 본고장은 어디였을까?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를 보면 대게의 생산지는 영덕, 영해, 평해, 길주, 명천, 북청, 함흥, 경흥, 단천, 홍원 등지였다. 이는 영덕 이북 동해 연안에서 대게가 잡혔던 것임을 알 수 있는 기록이기도 하다. 즉 경북과 강원도, 함경도 연안에서 두루 잡혔던 것이 바로 대게였다.

세종 대에는 함길도 도절제사가 “국왕이나 황제에게 진헌(進獻)할 동해의 붉은 대게인 자해(紫蟹)·미역인 감곽(甘藿) 등 물건이 모두 경원(慶源) 경내에서 생산되지 않으므로…(중략)…경원·길주 이남의 각 고을과 강원도 등 각 도의 생산되는 곳에 나누어 정하게 하소서(1431년 4월 28일 세종실록)”라는 계(啓)를 올리고 세종이 이를 허락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요즘 삼척이나 울진 영덕 등지에서 각각의 대게를 홍보하면서 자신들 고장의 것을 최고라고 하고 있지만 사실은 다 같은 대게여서 어느 곳의 대게가 진짜이며 상품(上品)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수율(대게의 살이 들어 있는 정도)이 좋고 싱싱하면 다 맛있는 대게인 것이다. 실제로 대게 위판량을 보면 영덕의 축산항과 강구항, 포항의 구룡포항, 울진의 죽변항과 후포항 등이 상위 순위에 올라 있다. 그런데도 일반적으로 영덕대게가 대게의 대명사로 불리는 이유는 바로 일제 강점기에 영덕의 강구항이 어항으로 크게 번성했고 대게 생산지로서의 명성을 선점했기 때문이다.

▲자사의 냉장고로 영덕게를 보관하라는 1970년대 신문광고.
냉장고 광고에 등장한 영덕게

영덕의 강구항은 이름으로도 알 수 있듯이 오십천의 바다쪽 입구여서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가진 항구다. 1920년대 후반에 수산가공 공장이 들어서 통조림을 생산했으니, 그 무렵부터 어항으로서의 명성이 자자했고, 1960년대 후반 대게의 대일 수출 물량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강구항의 대게가 영덕대게라는 명칭으로 일반인들에게 퍼져나갔던 것이다.

“화려한 빛깔/얕은 듯하면서도 씹을수록/깊어가는 독특한 맛으로/미식가들의 사랑을/독차지하고 있는 영덕게//그러나 영덕게는 섭섭하게도/바닷가가 아니고서는/그 참맛을 맛보기가/어렵다고 합니다.”

한 기업이 1977년 냉장고 광고를 하면서 신문에 낸 광고 카피다. 이 카피를 보면 1978년에 이미 영덕게는 미식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 현지가 아니면 참맛을 보기가 어렵다는 사실 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자사의 냉장고를 사서 대게를 잘 보관해 그 참맛을 보라는 것인데,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귀엽고도 재미있는 광고이다. 어쨌거나 이 시절부터 영덕게는 전국적인 명성을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

▲강구항 영덕게 경매 직전 모습.
3월 23일부터 25일까지는 마침 영덕대게 축제 기간. 그 기간에 영덕 강구항으로 간다. 오전 11시께 막 조업을 끝내고 돌아온 연안 통발어선에서 내려진 붉은 홍게가 강구항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구경꾼과 어부와 장사꾼이 어울려 강구항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다.

대개 홍게는 수심이 깊은 지역에서 잡히기에 통발로 작업을 하고 그보다 얕은 바다에서 잡히는 대게는 자망어선이 어획을 한단다. 영덕대게 축제 추진위원장이자 대게전문점 ‘씨월드(054-733-9888)’를 운영하는 이춘국 씨를 만났다. 대게가 탈각하는 장면을 촬영하는 데 성공하기도 한 그는 강구에서도 자타가 공인하는 대게 전문가이다.

▲영덕게장으로 비빈 밥.
그냥 먹어야 아름답다

“대게는 언제가 가장 맛있나요?”라고 먼저 질문을 던진다. 이춘국 씨는 “대게가 보름달이 뜨면 맛이 없다느니 하는 말은 다 엉터리예요. 대게는 11월부터 조업을 해서 이듬해 5월까지 잡습니다. 벌써 일부는 산란을 시작했는데 5월부터 10월까지는 어족자원 보호를 위해 금어기지요. 물론 1년 내내 ‘빵게’라고도 부르는 암컷은 못 잡게 되어 있습니다. 잡을 수 있을 때 잡히는 대게는 언제나 맛있습니다. 다만 수율이 문제지요. 대게는 전 생애 동안 6번 정도 탈각(脫殼)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 번 탈각할 때마다 보통 2㎝ 정도 커집니다. 탈각을 하면 몸에 살이 없어 물렁물렁해집니다. 이런 게를 물게라고 합니다. 이 물게가 살이 차면 탈각 직전 완전히 살이 들어차는데, 이게 바로 맛이 가장 좋은 박달게입니다. 계절에 상관없이 살이 꽉 찬 게는 맛있는 거고 살이 없는 게는 맛이 없는 거지요. 자망 어선이 한 번 조업을 나가 잡는 게 중에서 박달게에 해당하는 것이 10% 정도 됩니다. 이 게에는 영덕군이 보증하는 가락지를 끼우죠. 홍게와 영덕게는 쉽게 구분이 되고 수입산 러시아 대게는 표면에 흰색 딱정이 같은 게 많아요. 표면이 좀 깨끗한 것이 국산 게입니다.”

이춘국 씨는 대게 축제 기간이라고 특별히 더 맛있는 건 아니라고 한다. 다만 한겨울을 피해 날이 따뜻해지는 봄의 초입, 군의 다른 행사와 겹치지 않게 날을 잡다보면 대개 3월 말 정도가 축제일로 잡힌단다. 강구항의 대게 축제에는 해마다 약 7만,8만 명의 외지인이 와서 대게 맛도 보고 각종 축제 행사에 참가해 한나절을 즐긴다. 탁 터진 동해바다 풍경과 시원한 봄 바닷바람을 즐기며. 몇몇 궁금증이 해결되자 드디어 영덕게를 맛본다.

▲영덕게 집게살. 대게는 아무런 양념을 하지 않고 먹어도 제맛이 난다.
영덕게는 대개 찜으로 먹는다. 식당에서 20분 정도 기다리니 찜이 나온다. 먹기 좋게 손질한 대게. 게 눈 감추듯이 입으로 사라진다. 대게는 체면 차리면서 먹는 음식이 아니다. 손가락을 쭉쭉 빨며 게걸스럽게 먹어야 참맛을 느낄 수 있다. 다리 살과 다리 살을 압축한 듯한 밀도를 자랑하는 집게발을 허겁지겁 먹는다. 다리 살을 게장에 적셔서 먹어도 본다. 그 또한 일품이다. 아무런 양념을 하지 않고, 제 몸으로만 맛을 내는 어물도 드물다. 새우나 문어는 초장이나 간장, 기름장에 찍어 먹지만 게만큼은 ‘그냥’ 먹어야 제맛이다. 그래야 아름다운 맛이 난다. 태초부터 맛있는 게 바로 게 맛이다!

게만 보면 늘 허겁지겁 먹었는데 게가 쌓여 있어도 역시 마찬가지다. 게장으로 비빈 밥과 게 찌개로 마감을 한다.

영덕대게로를 달려 이색의 고향까지

배가 부르면 눈이 호사를 해야 한다. 강구에서 북으로 달려 축산으로 이르는 해안도로를 달린다. 온몸으로 시원함이 느껴진다. 작은 언덕을 넘으면 펼쳐지는 망망한 동해. 옹기종기 널려 있는 바위와 백사장. 전형적인 동해의 풍경이다. 자전거 도로도 잘 정비되어 있다. 중간 중간 횟집이며 영덕게를 파는 집도 널려 있다. 여름이라면 몸을 담그고 싶은 예쁜 해수욕장도 많다.

▲ 영덕군 괴시리의 괴정. 영덕은 목은 이색이 태어난 고장이다.
축산항 입구에서 바닷길과 작별하여 괴시리로 들어선다. 목은 이색이 태어났다고 하는 마을이다. 한옥 수십 채가 고즈넉이 이른 봄볕을 즐기고 있다. 이색은 고려 말 성리학의 대가로 격변기를 살았던 사람이다. 그의 대표적인 제자로 정몽주와 정도전이 있다. 고려에 끝까지 충성했던 제자와 고려를 꺼꾸러뜨린 조선의 설계자가 모두 그의 제자였던 것이다. 이 이색도 말년에는 그의 모토였던 공자님의 말씀조차 무시해가며 영덕게의 맛을 그리워했다.

어릴 때 맛본 음식 맛은 평생을 가는 법이다. 김치 한 조각, 된장 한 숟갈이 그러할진대 영덕게나 되니 이색의 그리움은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이색의 생가 터를 돌아보고 나서도 입과 손가락에 비릿한 게 맛의 여운은 여전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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