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 지방선거 이틀 전 글에서 “관상은 일종의 통계라서 전혀 근거가 없는 건 아니지만 관상에만 의지하는 투표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글을 읽은 분들 중에 관상이 정말 통계냐고 물어본 이들이 있었다. 필자는 통계라고 믿는다.
과거제도를 실시하기 전에는 ‘찰거(察擧 察:살필 찰, 擧:천거할 거)’라는 방식으로 인재를 뽑았는데, 찰거란 오늘날로 치자면 면접시험에 해당한다. 수백 년 동안 찰거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다보니 등용된 인물의 소행과 얼굴 생김새 사이에 모종의 연관성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런 연관성에 근거하여 사람의 생김새를 분석하고 연구한 것이 이른바 ‘관상학’이다.
“체상불여면상 면상불여안상 안상불여심상(體相不如面相 面相不如眼相 眼相不如心相)”이라는 말이 있다. 체(體), 면(面), 안(眼)은 각각 ‘몸 체’, ‘얼굴 면’, ‘눈 안’이라고 훈독한다. “몸이 아무리 잘났어도 얼굴이 좋은 것만 못하고, 얼굴이 아무리 잘생겼어도 눈빛이 좋은 것만 못하며, 눈빛이 아무리 좋아도 마음이 바른 것만 못하다”라는 뜻이다.
마음이 바르면 그 바른 마음이 얼굴에 나타나는데, 얼굴 중에서도 특히 눈빛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에 관상에서는 특별히 눈을 중시한다. 중국 동진(東晋)시대의 화성(화聖) 고개지(顧愷之)는 인물화를 다 그리고도 더러 수년 동안 눈동자를 그리지 않기도 했다. 사람들이 까닭을 묻자 “육신의 외적 아름다움은 인물화의 오묘함과 관계가 없다. 정신을 제대로 그려야 하는데 정신을 그려 넣는 관건처(關鍵處)가 바로 눈동자이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얼굴의 어원은 ‘얼 꼴’, 즉 ‘얼(정신)의 꼴(모양)’에 있다고 한다. ‘얼의 꼴’이 그대로 드러나는 곳이 바로 얼굴인 것이다. 거울을 볼 때마다 얼굴, 특히 눈빛을 잘 살펴서 지금 나의 정신 상태가 어떤지를 확인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더러운 얼굴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