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전 별세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삶은 '정치를 위한 모든 것'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다. 그의 정치 인생은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ㆍ16 쿠데타에 가담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쿠데타를 성공으로 이끌면서 군복을 벗고, 1963년 공화당 창당을 주도하며 정치계 전면에 등장했다. 하지만 공화당 창당 직전 권력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하자 돌연 출국, 그해 10월 박 전 대통령이 당시 제5대 대선에서 당선되자, 귀국함과 동시에 제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하지만 그의 정치인생은 끊임없는 굴곡으로 녹록치 않았다. 1962년부터 그는 한일협정 협상 담당자로 교섭을 담당, 1965년 6월 기본조약 조인에 앞서 일본 당시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장관와의 ‘김-오히라 메모’가 공개되면서 위기에 처했다. 메모에는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 등이 아닌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상업차관 1억 달러 이상 지원’에 대한 내용이 언급돼 있어, "한일협정은 매국협정"이라는 비난이 거세졌다. 결국 1964년 6월 3일 1만여 명이 거리 투쟁에 나서는 ‘6·3사태’로 이어지자 김 전 총리는 1964년 6월 또 한 번 한국을 떠났다.
3년 뒤인 1967년 김 전 총리는 제7대 총선에서 당선됐으나 1년 도 안돼 부정선거 논란이 불거지자 공직에서 사퇴했다.
이후 그는 다시 복귀, 1971년 민주공화당 부총재를 거쳐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제11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1979년 10ㆍ26사태로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린 그 해 11월 공화당 당무회의에서 총재로 선출된 그는 유력 대권주자로 급부상했다. 박 전 대통령의 그늘에서 벗어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도 잠시, 그는 5월 18일 새벽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함께 신군부에 의해 체포, 46일간의 구금생활과 함께 유신시대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계에서 또 한 번 퇴출됐다.
김 전 총재는 1987년 6월 민주화 바람과 함께 또 한 번 정계 복귀를 꿈꾸며 제13대 대선에 도전했으나, 유신잔당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4위를 차지했다.
이후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1990년에는 노태우 정권에서 민주자유당 최고위원이 되면서 유력 정치인으로 또 한 번 비상을 꿈꿨다. 하지만 1992년 제14대 대선에서는 3당 합당과 함께 김영삼 당시 대선 후보를 지원하며 대권 후보 자리를 내줘야 했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1993년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해 총재를 지냈고, 1995년에는 제15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97년 대선에선 자신이 창당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다시 대권에 도전했으나 선거 막바지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을 주도하며 김대중 당시 후보를 지지하며 또 한 번 실패를 경험, 당시 두 번째 국무총리를 지낸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2001년 9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둘러싼 지속된 갈등 끝에 DJP연합은 붕괴됐다.
노무현 정부 들어서 자민련은 2004년 당시 노대통령 탄핵에 동의했다가 역풍을 맞았다. 결국 2004년 17대 총선에서 자민련 참패의 책임을 지고 정계에서 영원히 은퇴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7·8·9·10·13·14·15·16대를 거치며 9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최다 기록이다.
김 전 총리는 지난 수십년 간 고(故)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한때 '3김(金) 시대'를 이끌며, '풍운의 정치인'으로도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김 전 총리는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달리 대권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이는 영원한 2인자라는 별칭을 얻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