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기획_도전하는 여성] ‘최고령 여성복서’ 김정애 씨 “엄마 아닌 ‘날 위한 나’ 한계 뛰어넘는 쾌감"

입력 2018-10-16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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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시설 배상책임보험업 인연으로 퇴근 후 매일 체육관-헬스 일상…12월 프로복서 데뷔 목표로 구슬땀

▲‘최고령 여성 복서’ 김정애 씨가 10일 서울 관악구 신림로 대한권투체육관에서 이투데이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좌우명을 자신의 몸에 문신으로 새긴 김 씨는 12월에 있을 프로복서 데뷔전을 위해 꾸준히 훈련하고 있다. 사진=고이란 기자 photoeran
“처음에는 앞구르기도 못했어요. 반복 또 반복을 거듭했더니 어느 순간 되더라고요. 복싱도 마찬가지예요.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는 거예요. 하기로 한 이상 집중해야죠.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새 성장한 저 자신을 마주해요.”

김정애(57·여) 씨는 지난 8월 관악구에서 열린 생활체육 복싱대회에서 딸뻘인 27세 여성을 상대로 TKO승을 거둔 아마추어 복싱 선수다. 줄곧 52㎏급에 출전했지만, 살이 잘 찌지 않는 탓에 이번에는 증량보다 감량을 선택했다. 본래 체중인 51㎏에서 3㎏을 뺀 48㎏급으로 출전한 대회에서 서른 살이나 어린 선수를 상대로 가뿐한 승리를 거뒀다.

10일 서울시 관악구 대한권투체육관에서 만난 김 씨는 민소매 티를 입고 글러브를 착용하고 있었다. 사전 정보를 듣고 만났음에도 실제로 본 그의 체구는 생각보다 더 작았다. 연약한 몸에 새겨진 문신의 크기는 시선을 사로잡았다. 158㎝에 48㎏밖에 되지 않는 체격이지만 양팔과 등, 옆구리 등에 자리한 커다란 문신은 좌중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첫 문신은 2017년에 했어요. 강하게 보이고 싶었어요. 확실히 상대를 긴장하게 하는 효과가 있더라고요. 처음엔 등에만 문신을 했는데, 하다 보니 팔도 하고 싶었어요. 최근엔 옆구리까지 했죠. 팔 안쪽에 새긴 제 얼굴은 이번 대회에서 이긴 후 새긴 거예요. 올여름에요. 이젠 복싱에 목숨을 바치겠다는 의미예요.”

50대 후반 여성의 몸 곳곳에 문신이 새겨진 것에 대해 세간의 편견이 있지 않았냐고 묻자 “왜 없었겠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김 씨는 “사람들은 제가 놀았던 사람인 줄 아는데, 술과 담배를 일절 하지 못해요. 모든 문신에는 저에게 중요한 말과 그림을 새겨넣은 것이에요”라고 했다.

왼쪽 팔에는 ‘지금 여기’라는 의미의 ‘n-ow here’라는 문신을 새겼다. 불교 신자인 김 씨는 “부처님 말씀처럼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석가모니가 세상에 태어나 하늘을 가리키며 했다는 말인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그 옆에, 봉황 그림은 오른쪽 팔에, 허리춤엔 ‘매화’ 등을 채웠다.

“처음 문신을 새기고 왔을 때 딸이 저랑 같이 걸어가려고도 안 했어요. 하지만 저는 눈치 안 봐요. 제 인생이니까요. 스스로 ‘누구의 엄마’라는 것을 깨지 않으면 안 돼요. 이제는 아이들이 친구들한테 자랑하더라고요. 엄마 멋있지 않냐고요. 제가 살면서 제일 잘한 게 문신이랑 운동 시작한 것 두 가지예요.”

그의 본업은 보험업이다. 24년 전 보험 회사에 입사했다. 현재는 체육시설 배상책임보험을 전문으로 하는 법인대리점 대표다. 복싱을 하게 된 계기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체육시설 배상책임보험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체육관 관장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그렇게 주짓수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무엇이든 허투루 하지 않는 탓에 주짓수를 처음 시작할 때도 모든 신경을 주짓수에 쏟아냈다. 그 결과, 현재 그의 등급은 ‘블루’. 다른 운동으로 따지면 ‘검은띠’ 정도로 이해하면 된단다. 김 씨는 “주짓수를 3년 정도 했는데, 그때 MMA랑 복싱을 같이했어요. 주짓수를 잘하기 위해 복싱을 했는데, 이젠 복싱이 제일 재미있어요”라고 했다.

슬하에 두 명의 자녀를 둔 ‘워킹맘’ 김 씨의 인생은 운동을 시작하기 전과 후로 나뉜다. “이전에는 일만 하고 애들 위주였어요. 법인 대표로서 회사 일도 정말 열심히 했죠. 제가 운동 안 한다고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요. 집에 가서 TV 보면서 쉴 수도 있죠. 하지만 저는 그런 인생이 행복하지 않아요. 제가 누군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았으면, 주위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가는 거죠. 한계를 느껴보는 것도 기회예요.”

▲최고령 여성복서 김정애 씨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고이란 기자 photoeran@
김 씨는 오전 10시에 출근해 오후 6시에 퇴근하는 전형적인 직장인의 삶을 살고 있다. 퇴근 직후 가장 먼저 향하는 곳은 집이 아닌 체육관. 2시간여 동안 복싱을 한 후에도 집에 돌아가지 않는다. 체육관 맞은편에 있는 헬스장으로 가서 부족한 근력운동을 한다. 김 씨는 “운동을 하면서 제 안에 있는 것들을 마음껏 분출해요. 완전한 선택과 집중이죠”라고 했다.

늦은 나이에 운동을 시작한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의지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세간의 시선보다 체력의 한계가 더 큰 걱정으로 다가왔다. 김 씨는 “의지는 어제보다 더욱 강해지고 있는데, 체력이 안 되고 그걸 이겨나가야 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아요. 젊은 사람들은 몰라요. 저는 1분 1초가 너무나도 아까워요”라고 했다.

작년에 두 번, 올해 두 번 아마추어 대회에 출전했다. 그때마다 ‘최고령 여성 복서’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그 수식어는 김 씨에게 강한 책임감이 됐다. 아픈 다리를 이끌고 올해 3월 출전한 대회에서는 안타깝게 패배했다. 김 씨는 “작년과 올해 모두 제일 나이가 많았어요. (경기에서) 지든, 이기든 자기와의 싸움에서는 이긴 기분이에요. 꾸준히 도전한다는 게 가장 어렵다고 생각해요”라고 했다.

김 씨는 스스로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는 스타일”이라고 설명했다. 시합에 출전할 때면 듣는 ‘최고령 여성 복서’라는 수식어를 위해서라도 질 수 없었다. 수많은 관중 앞에 서는 그 기분이 삶의 원동력이다. 경기를 보러 온 관객들을 위해 무엇이라도 더 보여주고 싶다고. 완벽한 무대 체질인 것도 복싱하면서 발견한 또 하나의 정체성이다.

김 씨는 12월에 있을 프로복서 데뷔를 목표로 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김 씨는 “규정상 39세까지 시합에 나갈 수 있어서 프로가 돼도 프로로서 시합에 나갈 순 없어요. (하지만) 도전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누가 하라고 하는 것도, 상금을 받는 것도 아니지만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제 이름을 남기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현재 본업, 엄마, 복서로서 삶은 몇 대 몇일까. 김 씨는 “딱 반반”이라고 했다. “선택하면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해요. 아주 평범한 말인 것 같지만, 그게 인생을 바꿔요. 저는 스스로 한계를 두지 않아요. 이 세계는 나이 제한을 두지만, 저는 스스로 제한을 두지 않는 거죠. 매일 운동하는 것도 내일 당장 대회가 열리더라도 바로 출전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는 겁니다. 이제야 저를 알았으니까요. 링에 오르면서 ‘엄마 김정애’가 아닌 ‘진짜 김정애’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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