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진의 만년필 이야기] 28. 김옥균은 만년필을 썼을까?

입력 2018-11-0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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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연구소장

“아니요. 이 방에 신기한 물건이 많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었소. 귀하가 쓰는 만년필이라는 것도 신기하고….”

최근 인기리에 방영된 TV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나왔던 대사다. 배경은 1900년대 초반. 만년필이 등장한 지 20년쯤 지난 시점인데 이게 여전히 신기한 물건이었을까. 당시 연필, 만년필 등 서양 필기구의 보급 현황을 보면 1910년에 이르러 관비유학생 시험에 연필 등을 지참하라는 공고가 나온다. 그러니 연필보다 귀했던 만년필이 1900년대 초엔 신기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 신기한 물건 만년필은 누가 처음 썼을까? 1876년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다녀온 김기수(金綺秀·1832~?)의 ‘일동기유(日東記遊)’엔 아래와 같은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붓과 먹, 한결같이 중국 제도를 따랐으나 굳이 옛날 것은 아니다. 근일에는 또 서양 사람들의 붓을 많이 사용한다. 화지(화紙)에 글을 쓰는데, 먹을 적시지 않고 종일토록 사용하니 무슨 방법으로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김기수가 일본에서 본 서양 사람들의 붓은 만년필이라는 시각이 있을 수 있지만, 시기를 따져 보면 연필로 보는 것이 맞다. 실용적인 만년필의 효시(嚆矢)인 워터맨은 1883년에 등장하니 해당 사항이 없다. 당시 만년필의 한 종류였던 스타이로그래픽 펜(stylographic pen)은 1875년에 나왔으나 1884년부터 일본에 수입됐으니 김기수가 봤을 리 없다. 워터맨 만년필은 1895년부터 일본에 수입된다.

이렇게 김기수가 소개한 연필은 갑신정변(1884년 12월 4일)이라는 근대사의 중요한 분기점에 드라마틱하게 등장한다. 그날 밤 김옥균은 일본군의 출동을 위해 고종의 친서(親書)가 필요했다. 사람이 다치고 포(砲)소리가 들리는 등 벼루에 먹을 갈고 붓을 들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노상(路上)이었기 때문에 김옥균은 고종께 연필을 올렸고, 고종은 연필로 ‘일사래위(日使來衛)’ 넉 자를 써준다.

▲김옥균과 그가 썼을 것 같은 스타이로그래픽 만년필.

그런데 왜 연필이었을까? 지워지고 고칠 수 있는 연필보다 만년필이 나았을 텐데. 김옥균에게 만년필이 없었기 때문일까? 개화파 문관(文官)이었던 김옥균은 이 새로운 필기구 만년필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김옥균은 1881년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과 1882년 3차 수신사 파견에 참여, 누구보다 일본 사정에 밝아 당시 일본에서 식자(識者)라면 만년필 하나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하는 유행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상회(商會)를 통해 수입된 것이 1884년부터이지 1880년대 초반엔 여러 경로를 통해 들어온 만년필이 꽤 많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일본이 수입 판매한 미국산 만년필의 가격은 1.75~3엔으로, 고급 쌀 10kg이 0.46엔 정도였으니 일반인에겐 꽤 비쌌지만 김옥균은 더 비쌌어도 값을 치렀을 것이다. 고종께 연필을 올린 것은 손에 잉크가 묻을 수 있는 만년필보다 연필이 낫다고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1884년에 우리나라에 만년필을 쓸 수 있는 양지(洋紙)는 있었을까? 당시 만년필은 샤프펜슬의 모양에 가운데 박혀 있는 바늘을 통해 잉크가 내려오는 구조여서 표면이 거친 한지(韓紙)는 쓰기 어려웠다. 1883년 10월 30일 양지에 인쇄되는 순한문 신문 한성순보(漢城旬報)가 창간돼 갑신정변까지 약 14개월 간행된 것을 보면 양지 수급엔 문제가 없었던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이 양지 제조를 위한 초지기(抄紙機)의 구매 계약을 체결하고 1884년에 들여온 사람 또한 김옥균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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