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 기념 전시회 등서 신경전…시진핑, 덩샤오핑 시대 정책과 반대로 가고 있다는 비판 받아
중국 정부가 다음 달 열리는 개혁개방 40주년 기념식을 준비하는 가운데 가장 강력한 양대 가문인 시진핑 가문과 덩샤오핑 가문의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15일(현지시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전했다.
개혁개방이 시작됐던 광둥성 선전시에서 두 가문의 대리전이 펼쳐지고 있다고 FT는 소개했다.
지난해 말 선전시의 서커우중국개혁개방박물관이 개관했다. 이 박물관의 입구를 차지한 것은 바로 개혁개방의 설계자인 덩샤오핑을 담은 대형 조각품이었다.
이 박물관이 올여름 별안간 리노베이션을 하고 나서 8월 재개장했을 때 덩샤오핑 조각품은 사라지고 시진핑 주석의 개혁개방 관련 글귀가 중국어와 영어로 적힌 전시품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9월 들어서 박물관 입구는 다시 시진핑과 덩샤오핑의 글귀를 모두 담은 전시품이 놓였으며 이달에는 원래대로 덩샤오핑 조각품이 들어섰다.
급격하게 바뀐 박물관의 일련의 변화는 겉으로는 안정적으로 보이는 중국 공산당 내부에 도사린 위험을 보여준다고 FT는 설명했다.
시진핑과 그의 가족에게도 내달 개혁개방 기념식은 의미가 있다. 바로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이 중국을 고립된 국가에서 탈피해 세계 2위 경제국으로 도약시킨 개혁개방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각시킬 수 있는 기회다. 시중쉰은 개혁개방 정책이 시작될 무렵 바로 그 요람인 광둥성의 당서기였다. 시진핑은 자신의 아버지가 개혁개방에 기여했다는 점에 강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시 주석은 40주년 기념식에서 자신이 주창한 ‘중국 사회주의 신시대’를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유산을 기반으로 세계에서 으뜸가는 국가로 중국을 거듭나게 할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가 바로 자신이라고 어필하고 있다.
시진핑은 올해 3월 당 헌법 개정을 통해 자신이 종신 집권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일각에서는 그의 권위주의적이고 국가 통제주의적인 방식이 덩샤오핑 시대의 성취를 위협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시진핑에 대해 비판의 중심에 선 진영이 바로 덩샤오핑 가문이다. 덩샤오핑의 아들인 덩푸팡은 지난 9월 연설에서 “중국은 개혁개방 시대의 정신을 되살려 국내 문제를 개선하고 외국과는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미국과 무역 전쟁을 벌이는 현 지도부를 꼬집어 비판한 셈이다. 중국 언론매체들은 덩푸팡의 연설을 보도하지 않았다. 그만큼 민감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시 주석 입장에서 덩샤오핑 측과 대립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위험하다. 중국인들은 개혁개방 설계자인 덩샤오핑을 숭상한다. 선전에서 덩샤오핑 사진이 있는 간판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던 한 소상공인은 FT에 “덩은 우리의 지도자”라며 “그가 아니었다면 오늘날 우리의 삶은 이처럼 번영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진핑은 2012년 당 총서기에 오르고 나서 집권 1기에는 덩샤오핑의 이미지를 희석하려 하지 않았다. 같은 해 선전을 찾아 덩샤오핑 동상에 화환을 바쳤다. 2013년 열린 18차 당대회에서는 개혁개방과 관련한 긴 정책 명단을 제시했다. 시 주석은 2016년 덩샤오핑 시대 농촌 개혁을 상징하는 안후이성 샤오강촌을 방문해 농지 개혁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발표했다.
그러나 40주년 행사를 앞두고 두 엘리트 가문 사이에서 분열이 표출되고 있다. 미국 조지타운대학의 데니스 와일더 교수는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에서 시중쉰의 역할을 적절히 평가하지 않았다는 감정을 시 가문이 느끼고 있다”고 설명했다.
올여름 베이징의 중국국립박물관에서 열린 개혁개방 40주년 전시회에서는 덩샤오핑이 아니라 시중쉰이 중심에 선 그림이 전시됐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비판이 거세게 일자 바로 그 그림은 치워졌다.
국립박물관에서 지난 14일 열린 또 다른 개혁개방 전시회에서는 시진핑의 사진이 가장 돋보이게 전시됐고 덩샤오핑은 장쩌민, 후진타오 등 시 주석의 전임자들과 비슷한 위치로 격하됐다.
기념식을 앞둔 이런 충돌은 단순히 두 가문의 자존심 문제가 아니라 시 주석의 정책을 둘러싼 공산당 내부의 갈등을 보여준다고 FT는 풀이했다.
시진핑은 중국의 문호를 더욱 넓힐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오히려 덩샤오핑 시대 정책과는 반대로 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많은 이가 시진핑의 모습에서 마오쩌둥의 권위주의를 떠올리고 있다. 그가 권력을 일원화하면서 전문적인 관료조직을 키우려 했던 오랜 노력이 무산될 위기에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호주 시드니공과대학의 펑충이 중국학 교수는 “중국의 정치 개혁은 10년 넘게 죽은 상태다. 경제가 고공행진을 해도 후퇴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며 “반면 덩샤오핑 시대 개혁은 사회와 관료들의 전반적인 지원을 받아 사방에 울려 퍼졌다”고 말했다.
시진핑 통치 하에 국영기업들의 지위는 높아지고 민간기업들에 대한 통제는 강해지고 있다. 반부패 캠페인을 빌미로 정치적 캠페인과 당파적인 숙청이 강해졌다. 시진핑에 대한 숭배가 지나쳐 마치 사이비 종교를 연상케 할 정도라고 FT는 꼬집었다.
비록 중국이 훨씬 부유해지고 서구권 국가들과 직접 경쟁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됐지만 지금 시 주석이 가는 방향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부동산 재벌인 펑룬 완퉁그룹 회장은 “개혁 초기에 공감대를 얻는 것은 쉬웠다”며 “그러나 40년 후인 지금 분열이 보이고 있다. 이데올로기적인 차이는 빈곤과 환경 문제, 외교 관계에 있어 서로 다른 처방전이 나올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1990년대 세계은행(WB) 중국 사무소 대표였던 피터 보틀리에는 올해 9월 중국발전포럼에서 “현 중국 정부가 추구하는 경제 모델이 새로운 형태의 국가 자본주의는 아닌지 걱정된다”며 “이는 중국의 장기적인 수요와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은 중국의 오랜 역사와 깊은 문화에 바탕을 둔 것으로 중국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나갔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