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기자가 해봤다] '세상음치'의 홍대 버스킹 수난기…"크리스마스의 기적은 없었다"

입력 2018-12-2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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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뮤지컬 배우 이동규와 본지 기자와의 버스킹에 모인 관객들. 이들은 뮤지컬 배우의 무대를 즐기다가도 음치 기자가 노래를 시작하면 화들짝 놀라며 현장을 떠났다. (나경연 기자 contest@)

대표적인 크리스마스 특선영화 '나 홀로 집에' 줄거리는 우연과 기적으로 점철된다. 어린 소년 케빈(맥컬리 컬킨 분)이 2인조 좀도둑 마브 버챈츠(다니엘 스턴 분)와 해리 림(조 페시 분)을 골탕 먹이는 모습들은 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기적 같은 상황들의 합집합이다.

'세상음치' 기자도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바라고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홍대 버스킹에 도전했다. 무모한 도전은 드라마 같은 결말 대신 "크리스마스의 기적은 없다"로 끝났다. 대신 다섯 손가락이 넘어갈 정도로 다채로운 감정들이 마음속에 남았다.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을 끝냈다는 성취감과 생전 처음 해보는 경험에서 우러나는 뿌듯함은 2018년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충분했다.

24일 오후 4시. 젊음의 거리로 상징되는 홍대는 이른 저녁임에도 축제를 즐기러 온 사람들로 길거리가 붐볐다. 삼 일 전, 마포구청 사이트에서 야외공연장 사용신청서를 작성할 때까지만 해도 사람이 없는 한적한 시간대가 될까 우려를 했다. 하지만 막상 홍대 거리의 엄청난 인파를 보자, 나의 비루한 노래 실력을 선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앞섰다. 그리고 두려움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홍대 거리는 이른 오후 시간대부터 크리스마스이브를 즐기기 위한 사람들로 가득 찼다. (나경연 기자 contest@)

버스킹은 하고 싶지만, 사람들에게 피해는 주고 싶지 않았다. 크리스마스이브를 즐기러 온 사람들에게 몇 시간 동안 음치의 노래를 듣게 하는 것은 고문과 다를 바 없는 괴로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노래로 오염된 귀를 바로 정화할 수 있도록 뮤지컬 배우 이동규를 지인 찬스로 활용했다.

"Last Christmas~"

그가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와 'Last Christmas'의 첫 소절만 불러도 우리가 있는 '버스킹존2' 구역으로 관중들이 몰렸다. 그러다 내가 노래를 시작하면 몰려왔던 발걸음들이 바쁘게 떠났다. 이동규의 노래에 밀물처럼 왔던 사람들은 내 노래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때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홍대 버스킹존은 철저히 실력으로 평가받는 냉혹한 곳이라는 것을.

▲배우 이동규의 무대가 시작되자 많은 관중들이 버스킹 존으로 몰려들었고, 대만에서 온 한 관광객은 두 시간 동안 진행된 버스킹을 처음부터 끝까지 촬영하기도 했다. (나경연 기자 contest@)

밀물과 썰물의 반복은 나를 무한 자괴감에 빠뜨렸다. 유일하게 관중들을 붙잡을 방법은 '스토리텔링'이었다. 비루한 노래 실력을 소유한 내가 왜 홍대 거리에서 민폐를 끼치고 있는지, 관중들이 왜 이 비루함을 용인해줘야 하는지 솔직하게 고백했다.

"저는 세상음치에요. 그런데 제 버킷리스트에는 버스킹이 들어가 있어요. 올해 제대로 이룬 목표가 하나도 없는데, 2018년이 가기 전에 용기 내서 버스킹 한 번 해보려고 도전했어요. 괴로우시더라도 조금만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오늘 제가 버스킹을 하고 나면 앞으로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아요."

관중들의 썰물은 계속됐지만, 그 속도는 이전보다 확연히 느려졌다. '너의 노래가 왜 그 상태인지 이해했다'라는 표정의 관중들이 계속 자리를 지켜줬고, 징글벨락 노래를 부를 때는 함께 'Jingle bell rock'을 외쳐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것은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바로 '떼창'이었다.

사람들이 함께 징글벨락을 외쳐줄 때의 그 소름. 나의 진심이 그들의 진심과 통했다는 느낌은 언어가 가진 한계를 느끼기에 충분할 정도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경험이었다. 비록 열 명 안팎의 관중들이었지만, 내게는 그들이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와 '어거스트 러시'에 맞먹는 팬덤이었다.

▲평소에 용기가 없어 버스킹에 도전하지 못했던 시민들을 버스킹 가수로 즉석에서 섭외했다. 함께 관람하던 관중들은 응원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나경연 기자 contest@)

감동은 함께 나눠야 두 배가 되는 법. 버스킹을 원하는 음치 찾기에 돌입했다. 자신을 음치로 명명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버스킹에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내 노래 실력에 희망을 품으라는 격려에 한 사람이 손을 살짝 들었다. 서울에 산다는 김모(28) 씨는 마르고 작은 몸으로, 수줍게 선곡을 했다.

"인어공주 수록곡인 'Part of your world' 불러 볼게요."

선곡부터 예사롭지 않았고, 예감은 정확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정도의 소름 돋는 가창력. '내 노래 실력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라는 궁금증이 곧바로 뒤따랐다. 하지만, 이런 실력의 소유자도 버스킹은 처음이라는 말에 용기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했다.

김 씨에 이어 몇몇 시민들을 즉석 섭외해 버스킹을 이어나갔다. 노래를 들을수록 왜 이들이 내가 서 있는 곳이 아닌, 나를 바라보는 관중석에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의 실력이었다. 당장 앨범을 내도 무방할 정도의 실력자들이 무대가 아닌 관중의 자리에 있는 것.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용기가 없기 때문 아니었을까.

▲밤까지 이어진 버스킹에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노래에 임할 수 있었다. 노래 실력은 늘지 않았지만,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스스로를 편안하게 만들어줬다. (나경연 기자 contest@)

나 역시 용기 부재자였다. 홍대 버스킹은 10년 동안 간직해 온 혼자만의 소원이었다. 그 소원을 '크리스마스'의 다섯 글자가 주는 환상에 기대 성취해보고자 마이크를 잡았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내 노래 실력은 여전했으며, 노래를 들은 관중들은 멀리 떠나갔다.

그럼에도 떠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았던 당돌함과 마이크를 들고 홍대 거리 한가운데에 서 있었던 무모함은 지금까지도, 또 앞으로도 하지 못할 가치 있는 경험이 되리라 확신해 본다.

▲버스킹 존에 가져다 놓은 앰프와 마이크. "음치가 버스킹도 했는데 뭔들 못할까." (나경연 기자 contest@)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부인 엘리노어 루스벨트는 정치가이자 사회운동가였다. 여성에 대한 유리천장이 견고하던 1900년대 초반, 그가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마다 받게 되는 관심과 무조건적인 비난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당신이 마음에서 옳다고 생각되는 행동을 해라. 당신이 어떻게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테니."

어떤 행동을 하든 그 행동을 칭찬하는 사람과 비난하는 사람은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현대인들이 살아가면서 골라야 하는 수많은 선택지 중 무엇을 고르더라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렇다면 2019년 새해에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이것저것 재지 말고 그냥 도전해보자. 어차피 반대할 사람이라면 뭘 하든 반대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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