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광고로 보는 경제] “남자가 앞치마 같은 거 두르면 ‘고추’ 떨어진다”

입력 2018-12-28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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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어느 여성잡지에 실린 '크린랲' 광고. 당시 25세의 풋풋한 배우 최수종이 앞치마를 두른 모습으로 광고하고 있다.

1997년 한 여성잡지의 광고

‘랲은 역시 크린랲!’

지금도 판매 중인 주방용 랩 상품인 '크린랲'의 광고다. 중요한 것은 상품이 아니라 모델이다. 이제는 50대 중반의 중견 배우지만 당시 25세였던 풋풋한 최수종의 모습이 인상적이기도 한데, 실은 최수종도 핵심이 아니다.

이 광고의 포인트는 모델의 ‘성별’이다.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용품을 광고하는 귀엽고 젊은 남자 배우의 모습. 한국 광고계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점의 시작이었다.

▲위 '크린랲' 광고와 같은 잡지에 실린 당시의 평범한 청소기 광고. '청소기는 앞치마 두른 아줌마가 사용한다'는 명제는 이 당시 상식이었다. 심지어 이 광고는 '섹슈얼 코드'까지 포함돼 있다.

◇“남자가 ‘고추’ 떨어지려고 앞치마를 둘러?”

랩은 주부가 사용하는 물건이다. 1980~1990년대 초반의 ‘주부’라는 단어엔 지금은 사라진 함의가 하나 있었다. ‘여경’, ‘개그맨’같은 단어에서처럼 ‘주부’라는 단어 자체에 이미 ‘여성’이라는 의미가 함축돼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당시 주부가 사용할 만한 모든 용품은 다 여성을 모델로 기용했다. 냉장고, 청소기, 세탁기, 가공식품 등… 이런 것들을 한 손에 들고 있는 앞치마 두른 ‘주부’. 이것은 ‘클리셰’라고 부르기도 어색할 만큼 확고하게 고정돼 있던 광고 모델의 상이었다.

▲1988년 방영된 삼성전자의 VTR 광고. 고(故) 최진실의 유명한 광고문구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를 외치는 장면이다.

1988년, 삼성전자의 한 광고에서 당시의 성 역할을 극명하게 드러내주면서도 지금까지 널리 회자되고 있는 고(故) 최진실의 광고 속 대사가 있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

◇꽃미남이 차려주는 훈훈한 저녁식사

최수종이 위의 광고 게재시점보다 5년 전인 1992년에 출연한 드라마 ‘아들과 딸’은 한 가정에서 지나친 남아선호사상으로 아들과 딸을 차별하는 사회의 부조리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어 2000년에는 주부였던 ‘아줌마’가 한 사람의 여성,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드라마 ‘아줌마’가 방영된다. 성 역할의 관념은 이때 쯤부터 차차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2010년대로 들어서면 노골적인 성차별을 내포한 광고는 거의 사라진다. 이 시점부터는 만약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을 운운하는 광고가 게재된다면 해당 상품의 타격뿐 아니라, 상품의 제조사, 광고 제작사, 출연배우 등이 모두 당장 내일의 안녕을 기약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2010년대 중반부터 ‘앞치마 두른 엄마’를 뒤집은 역발상의 광고 트렌드가 등장한다. 가정적인 분위기의 꽃미남이 광고하는 가전제품 광고가 나타난 것. 소지섭이 열어주는 김치냉장고, 이승기와 김수현, 원빈이 밥해주는 밥솥…. 나를 위해 식사를 준비했다는 훈남 배우들의 자상하고 달콤한 속삭임.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는 어필이다.

▲쿠쿠밥솥 광고에 나온 배우 김수현(위)과 가수 이승기. 약 5년 전쯤 주방가전 광고는 이런 꽃미남 배우를 앞세우는 것이 트렌드였다.

근데 이 트렌드는 결국 다른 형태로 변환된 젠더의식의 문제를 안고 있다. 한 번만 더 생각해봐도 이런 광고들이 “우와! 나도 김수현처럼 밥 해주는 멋진 남자가 돼야지!” 하는 식으로 남자들의 마음을 저격하기 위해 만든 광고라고 보긴 어렵다. ‘결국 주방용 가전을 사용할 이들은 여성이므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겠다’는 목적의식에서 나온 광고라고 해석하는 게 합리적이다. '주방=여성'이라는 공식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최근 광고 속의 성 역할은 또 한 번의 패러다임 전환이 이뤄지고 있다.

◇“송중기가 밥 차려주는 광고가 현실감이 있긴 하냐?”

하지만, 송중기, 김수현, 소지섭, 원빈이 밥 차려주는 광고는 보기에 설레긴 하는데 현실감이 너무 떨어진다. 그래서 구매욕을 자극하는 데 한계가 있는 것이다. ‘스타워즈’를 봤다고 광선검을 갖고 싶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일반인에 가까운 훈남 모델을 내세운 최근의 삼성 냉장고 광고. 진짜 내 곁에 있어 줄 것만 같은 리얼리티가 포인트다. 성차별적인 요소도 철저하게 배제해 제작했다.

이제 주방용품 광고 모델은 일반인에 가까운 모습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 치고는 상당히 잘생긴) 남편이 역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보다는 상당히 미인인) 아내와 알콩달콩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밥을 차린다. 아내가 임신했기 때문에 남성이 밥을 차려준다거나, 남자가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아내는 아기를 돌본다는 구체적인 설정도 부여했다. 광고에서 차별적인 성 역할 관념이 발생하지 않게 하려고 극도로 주의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설정이다.

자본주의의 총아, 광고. 상업광고는 올바른 사회관을 확립하기 위해서 제작되는 게 아니다. ‘앞치마 두른 아줌마’에서 ‘남편은 식사 준비, 아내는 육아의 분담’에 도달하기까지 광고 트렌드의 여정은 그렇게 광고하는 게 ‘돈이 되니까’ 바뀌어 온 것이다.

사회학의 경제화, 혹은 경제학의 사회화. 무엇이라고 부르든 간에 세상은 점차 평등함을 지켜야 돈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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