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칼럼니스트
자부심 넘치는 청소원의 대답이 실로 존경스럽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지 몰라도 이런 가치관으로 무장한 이 청소원의 삶은 참으로 보람차고 당당했을 것이다. 이 일화는 무슨 일을 할 때 사명감이나 소명의식을 가져야 함을 강조할 때 인용된다.
NASA 청소원처럼 사명감 있었다면
그런데 유인 우주선을 달에 쏘아 올리는 엄청난 과학기술적 과제가 과연 NASA 건물의 청소 상태와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될까? 아마도 아주 미미하게, 아주 간접적으로 관계가 있거나 별 관계가 없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둘 사이에는 눈곱만큼도 상관관계가 없다. 말 그대로 ‘무관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난해한 현대물리학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세상, 이 존재의 세계는 그 어떠한 사물이나 사태도 여타의 사물이나 사건과 전적으로 무관하지는 않다. 대단히 간접적이고 대단히 우회적으로라도 모든 사물과 사태는 서로 연결돼 있다고 한다. 이런 특성은 마치 엄청나게 큰 그물의 한쪽 끝이 그 그물 전혀 반대쪽의 그물눈과 결국은 연결돼 있는 점에 비유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거미줄처럼 서로 이리저리 연관된다. 얽히고설킨다는 것이다. 최근 널리 쓰이는 ‘나비효과’라는 용어는 존재 세계의 이런 성질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만연한 안전불감증, 불안한 사회
우리나라에서는 크고 작은 재난과 사고가 심심찮게 발생해왔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는 세월호 사고는 제쳐 놓더라도 그러하다. 작년 한 해만 해도 기차 탈선, 화재, 가스 폭발, 펜션에서의 가스 누출 등의 사고가 언론을 도배했다. 불과 사나흘 전에도 20대의 새파란 젊은이가 대형 장비에 끼여 죽은 끔찍한 사고가 보도됐다. 여러 유형의 사고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우리 사회 안전의식의 현주소를 말할 때 흔히 ‘안전불감증(安全不感症)’이라고 한다. 안전에 관한 한 아예 아무런 지각능력이 없는 병적 상태에 놓여 있다는 말이다.
우리의 안전의식에 대해 ‘불감증’이라는 딱지가 붙는 게 단지 명칭 문제에 불과한 것일까? 우선 우리의 안전의식을 점검해 보자. 다른 건 다 제쳐 놓더라도 비슷한 사고와 대응 행태가 계속 반복된다는 점만으로도 병적 수준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사고 배경에는 무슨 약속이나 한 것처럼 부실한 시공, 지극히 형식적인 안전점검, 아예 없거나 있어도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는 매뉴얼, 미비하거나 폐쇄된 비상탈출구 등의 문제가 늘 떡하니 버티고 있다. 사고 수습이나 재발 방지 대책이라는 것도 분명한 원인 규명이나 면밀한 검토 없이 그야말로 누더기를 얼기설기 꿰매듯이 성급히 마련된다. 사고에 관한 언론 보도가 잦아들 만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사람들은 평상심(?)을 회복한다.
사고 이후의 재발 방지 노력에 대해 흔히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고 비웃는다. 굳이 이런 비유를 쓴다면 우리의 안전의식은 ‘소 잃고도 외양간 팽개쳐 두기’ 또는 ‘소 잃고도 외양간 고치는 시늉만 하기’에 가깝다고 본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여러 사고를 살펴보면, 사고 원인 제공자나 이와 비슷하게 연관된 사람들만이 유독 악독하거나 예외적으로 낮은 안전의식을 지닌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의 안전의식도 국민의 평균 수준인 것 같다. 안전 관리와 검사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보면, 원칙과 규정에 따라 엄격히 업무를 수행하면 점검 대상자에게서 유난스러운 사람으로 간주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라고 한다. 생트집을 잡으려거나 심지어 무슨 뇌물을 기대하는 걸로 오해받는 경우조차 있단다. 일상적 대화 가운데서도, 안전 문제를 걱정하는 사람은 ‘지나치게 소심한’ ‘쓸데없는 걱정이나 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안전 경시나 무모함이 대범함이나 담대함과 동의어처럼 쓰이기도 한다. 결국 국민 대다수의 안전의식은 심각한 질병 수준의 ‘안전 불감증’에 걸려 있음이 분명하다.
툭하면 이런저런 사고가 일어나는 터에 평온한 마음을 가질 수 없다. 언제 어디서 무슨 날벼락을 맞을지 모르는 판에 어찌 마음 한 구석이 불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은유적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지금 나와 내 가족의 목숨이 붙어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여기면서 가슴을 쓸어내리는, 기도 아닌 기도가 저절로 튀어나올 정도다.
백성의 믿음보다 더 기본적인 안전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에 공자와 제자 자공(子貢)의 문답이 나온다. 자공이 정치의 요체를 묻자, 공자는 “식량을 풍부하게 하고[足食], 군대를 튼튼히 하고[足兵], 국민의 믿음을 얻는 일[民信]”이라고 대답한다. 자공의 이어지는 질문에 공자는 이 세 가지 중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 둘을 포기해야 하는 극단적 상황에서도 끝내 지켜야 하는 것은 백성의 믿음이라고 단언한다. 백성의 신뢰가 없으면 나라가 아예 존립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란 뜻깊은 단어가 역사에 등장하는 대목이다.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좌우할 수 있을 만큼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첨단 산업사회에서 불안전하다는 게 무엇인지는 공자라도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원시적 농경사회 시절에 살았던 사람이니까.
공자가 오늘 우리나라와 같은 첨단 산업사회에 산다면 뭐라고 말할까? 안전을 믿음(信)의 기초라고 또는 믿음보다도 앞서 충족시켜야 할 요소라고 말할 것 같다. 아마도 ‘안전하지 않고서는 나라가 제대로 설 수조차 없다’[無安全不立]고 말할지 모른다. ‘믿음 없이는 나라가 설 수 없지만, 그 믿음은 굳건한 안전을 바탕으로 하여 나온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사소한 행동도 인간의 생명과 연결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이 세상에서 인간의 생명보다 더 존귀한 것은 없다. 한 개인의 생명은 전 우주를 통틀어 유일무이한 것이고 일단 죽으면 되살릴 길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모든 악 중에서 인간 생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악이다. 안전불감증이 지극히 나쁜 까닭은 설령 애초에 전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불시에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를 죽이거나 다치게 할 잠재적 위험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점을 깨닫지 못하는 데 있다.
무겁지 않은 의사결정이나 사소한 일상적 행동도 인간의 생명이나 신체를 죽이거나 다치게 할 개연성을 지니고 있다. 비용을 줄인다고 부실 시공하는 것, 지나치게 까다롭게 군다는 평판을 듣지 않으려고 안전 점검을 건성으로 하는 것, 익숙하고 가까운 길이니 괜찮겠지 하고 음주 운전하는 것, 이런 안이함과 무신경함이 얼마든지 살인이나 상해를 일으킬 수 있다. 한마디로, 안전불감증은 살인이나 상해를 예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일견 안전과 무관해 보이는 사소한 행동도 결국 인간의 귀하디 귀한 생명과 엄연히 연결된다. 이 분명한 사실을 깊이 인식하여 무디고 안이한 안전의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안전에 관한 한 툭하면 정부나 특정 집단을 향해 손가락질하거나 누구를 탓하는 버릇도 고쳐야 할 것이다. 적어도 안전 문제와 관련해서는 일반 국민 모두 스스로를 향해 ‘내 탓이오’ 하고 반성해야 할 부분이 작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시작하기 전에 “나(우리)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은 모두 사람의 생명과 연결돼 있음을 절대로 잊지 말자!”라고 구호라도 외쳐야 할 판이다. 마치 군인들이 훈련 전후에 의지를 굳건히 다지느라고 구호를 크게 외치듯이. 사뭇 유치한 발상이지만, 안전불감증이 만연해 있는데도 대다수가 별 문제의식조차 품지 않고 있는 듯하여 떠올려본 생각이다. 적어도 금년 한 해만큼은 우리나라가 진정으로 안전, 평온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