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술 평론가, 전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
가짜의 배경에는 기록을 남기지 않고 조용히 이루어지는 미술품의 거래 관행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 환경에서는 시장참여자들 사이에 거래정보가 잘 공유되지 않는 데다 그것마저 비대칭이기 때문에 가짜가 제대로 걸러지지 않는다. 자연히 과다한 거래 비용이 발생하고, 극단적으로 시장 실패로 이어지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미술 시장은 정보 제약으로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말인데, 그 과정에서 가짜가 큰 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가짜는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선진국에도 후진국에도 있고, 금전적 유인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존재한다. 문제의 본질은 어떻게 관리하고 폐해를 최소화할 것이냐다. 음성적인 거래 관행이 개선되고 공신력 있는 감정기관의 의견이 폭넓게 공유될 때 가짜는 설 자리를 잃는다. 이론적으로 공개된 장소에서 경쟁하는 경매시장(옥션)이 가짜를 몰아내는 좋은 시스템이다. 그러나 현실과 괴리되는 것이 이론의 숙명인지 경매의 역할은 제한적이고, 미술 시장에서 가짜는 들풀 같은 강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한편 가짜는 시장 규율과 신뢰 부족의 결과물로 볼 수도 있다. 어떤 사회나 조직이든 지속적인 발전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제도와 함께 구성원 사이의 신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후쿠야마(F. Hukuyama, 1952∼ )는 “신뢰란 사회 구성원들이 공동의 목표를 위해 함께 일할 수 있도록 이끄는 협동의 규범”이라고 정의하고, 혈연이나 지연 학연을 바탕으로 하는 ‘태생적 신뢰’가 아닌, 공공적 규범을 바탕으로 서로 믿고 협력하는 ‘사회적 신뢰’가 굳건한 조직만이 궁극적으로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나는 우리 미술 시장의 낙후된 모습을 볼 때마다 후쿠야마의 말을 떠올리지만, 시장은 그 말에 담긴 신뢰의 의미에 주목하지 않는다. 문제를 안고 가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일까? 시장 상인과 컬렉터는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더불어 성장하는 관계일 터인데, 상인들은 신뢰의 고리로 연결되는 그 관계를 단박에 끊어 버리는 가짜의 날카로운 칼을 휘두르고 싶은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참고로 미술에 흥미를 갖고 시장에 들어오는 초심자가 자신이 구입한 작품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실망과 분노, 좌절감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다. 십중팔구는 갓 피어나던 관심을 접게 되고, 시장은 결국 한 사람의 잠재적 컬렉터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짜는 어쩌면 ‘승자의 저주’를 생육하는 자양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가짜를 만들고 팔아 재미를 본 사람은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궁극적으로는 파멸로 가기 마련이다. 도박으로 한 번 큰돈을 따면 그것에 빠져 결국 패가망신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일시적으로 몇몇에게는 득이 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그것은 분명 모두가 함께 망하는 길이다.
오늘도 시장에서는 가짜가 거래되고 더불어 다양한 삶의 모습이 펼쳐진다. 가짜를 사는 사람이 있으니 파는 사람이 있는 것은 자연스럽고 그것이 살아가는 익숙한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모든 것을 긍정하기에는 우리 사회의 귀와 눈은 충분히 예민해져 있다. 하지만 나는 “가짜가 늘어날수록 진짜는 하나의 권력(power)이 되고, 결국 가짜는 진짜의 가치를 올려주고 소멸할 것이다”는 역설적인 믿음 때문인지 그 예민함이 왠지 무덤덤하게만 느껴진다.
사족으로 덧붙인다. 농으로 던지는 말이지만, 나는 가짜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범람하여 시장의 질서가 깨지고 신뢰가 허물어져서는 안 되겠지만, 약간(?)의 가짜는 미술품에 대한 우리 사회의 감정 수준을 높이고 컬렉터들의 안목을 높이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순기능이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냉면의 겨자나 골프의 소액 내기처럼 음식의 맛과 게임에 적당한 긴장을 더하는 정도의 가짜라면 필요악으로 인정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너무 세속적인 비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