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를 이끄는 여성 리더⑥] "'최초 여성검사'로 보여준 '소프트파워', 국회서도 발휘하겠다"

입력 2019-03-0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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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배숙 민주평화당 의원 인터뷰

2000년 9월 19일 군산시 대명동의 무허가 윤락업소 화재로 여성 5명이 사망했다. 2002년 1월 19일에는 군산시 개복동의 윤락업소에서도 불이 나 여성 14명이 숨졌다.

조사 결과 이들은 감금 상태로 생활하고 있었다. 불구덩이 속에서도 문을 열지 못해 화재 현장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다. 그들에게 인신매매와 성매매 강요, 폭행은 일상이었다. 2002년 7월 25일 조배숙 의원(현재 민주평화당) 등 74인이 '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처벌 및 방지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하게 된 계기가 됐다.

▲조배숙 민주평화당 의원이 최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이투데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고이란 기자 photoeran@

"처음엔 창살 때문에 탈출하지 못했어요. 창살을 단속하니까 문을 변형시킨 거예요. 밖에서 잠그면 안에서는 못 열게 해놨어요. 안에서도 열쇠가 있어야 나갈 수 있는데, 연기가 나니까 열쇠를 찾다가 못 찾아서 14명이 죽은 거죠. 모두 문 앞에 우르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조 의원은 당시 초선이었다. 2004년 2월 국회 본회의에서 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안과 성매매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이 통과되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조 의원은 "시기상조라는 반응이 많았다"며 "의원님은 여자라서 남자를 너무 모른다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 윤락행위는 여자가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던 시대였다"고 했다.

탈성매매 교육을 하기 위해 예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수많은 벽에 부딪혀야 했다. 조 의원은 "안 그래도 쓸 돈이 많은데 그런 애들한테까지 돈을 쓰냐는 말까지 들었다"면서 "여러가지 어려운 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여성들이 탈성매매를 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면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조 의원은 1956년 9월 10일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나와 2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 12기를 수료하고 그의 이름 앞에는 '국내 최초 여성검사'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검사, 판사, 변호사 '법조삼륜'을 모두 경험한 이력이 있다.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제17대 국회의원(전북 익산 을)에 당선돼 국회에 입성해 '호남 정당'인 민주평화당 대표를 역임했다. 4선 의원인 조 의원을 최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만났다.

- 1남 5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극장주 아버지와 전업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공부를 하는 데 환경적 제약은 없었나.

"아버지와 함께 극장을 운영하는 분이 아들을 데리고 사무실에 왔대요.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 법대를 보내서 판사를 시킬 거라고 하셨대요. 저희 아버지는 '나도 질 수 없지'라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딸이라고 왜 못해?'라면서 공부하라고 하셨죠. 저희 아버지는 페미니스트였어요. 여성들도 다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교육에는 투자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조 의원은 '최초 여성검사'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그는 "페미니스트였던 아버지 덕분에 교육적 차별을 받지 않았다"고 했다. 고이란 기자 photoeran@

-대학시절은 어땠나.

"75학번엔 여학생이 딱 4명이었어요. 강금실, 김영란 조배숙이 한 학번이었던 거예요. 여학생이 많지 않아서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지 못한 게 좀 아쉬워요. 당시만 해도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이 존재해서 남녀가 자연스럽게 어울리기도 쉽지 않았어요. 실력으로 보여주자는 생각을 하곤 했죠."

-'최초 여성검사'이다. 힘든 일은 없었나.

"검사시절 제 앞에 명패를 따로 해두지 않았어요.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검사를 찾으러 왔다가 검사 자리에 젊은 여성이 앉아있으니 제 앞쪽에 앉아있는 입회 수사기장한테 '검사님'이라고 하는 거죠. 당연히 여자는 검사가 아닐 거라는 인식이 있었으니까요."

-검사를 그만두고 판사가 됐다. 이후 1995년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이 과정이 녹록지 않았을 것 같다.

"처음 개업할 때 사람들이 '왜 개업하는가. 정글이다. 판사로 편하게 있어라'라고 하더라고요. 판사라는 생활도 좋지만, 1989년 일본에 객원연구원으로 다녀온 적이 있는데, 세상이 참 넓구나! 생각을 하게 됐죠. 대법원까지 가면 좋은 일이지만, 그렇게 사는 게 제겐 의미가 없을 거 같았어요.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개업을 했죠.

제가 검사를 해서인지 형사를 많이 맡았어요. 여성변호사가 많지 않았던 때여서 여성변호사는 잘하지 못할 거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제가 공전의 히트를 한 거죠.(웃음) '서초동 여성파워'를 완성해서 보여줬으니까요. 여성 후배 법조인들이 우리도 개업을 하면 잘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 같아요."

-딱딱할 것만 같은 변호사의 이미지를 바꿨다.

"수많은 사건을 맡았어요. 당시 변호사를 선임했는데, 선임해도 볼 수가 없다는 불만이 많았던 시절이었죠.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너무 무리한 건 적당히 거절했지만, 성실하게 접견하는 게 제 책임이라고 생각했어요. 매주 토요일에 접견을 갔는데, 신청자가 엄청나더라고요. '조배숙한테 물어보면 답이 나온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조 의원은 서지현 검사의 '미투'에 대해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평가했다. 고이란 기자 photoeran@

-초선 시절에 만든 '성매매특별법'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14명이 처참하게 죽었어요. 여성 인권이 그 정도였던 거죠. 무슨 권리로 여성을 돈으로 협박해서 성매매를 시키나요. 한 번 연루된 여성들은 빠져 나오기도 힘들어요. 배운 것도 없고 건강도 좋지 않아서요. 2005년쯤 국회의원이 부시 대통령 참모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부시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대요. '노무현 대통령하고 여러가지 마음이 맞지 않는 것들이 있는데, 성매매 방지법은 정말 잘했다'라고요."

-2018년 1월 서지현 검사의 검찰 내 성폭력 폭로 이후 각계에서 미투가 터져나왔다.

"정말 용기가 있는 행동이었어요. 남성들은 기본적으로 같은 직업의 현장에서도 여성을 동료로 인정하지 않고 성적 대상으로 보는 거예요. 서지현 검사는 법률적인 지위가 있는데도 그런 일을 당한 거죠. 정말 자존심이 망가지는 상황이에요. 말 못하고 흘려보낸 사람들도 많을 텐데, 수면 위로 떠올리고 공개적으로 얘기해줬어요. 검사 스스로 검사 사회를 얘기할 때 얼마나 고민이 많았겠어요. 큰일을 한 거죠."

-총선이 다가온다. 어떻게 전망하고 있는가.

"민주평화당은 국민의당과 갈라서야 했습니다. 창당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무에서 유를 창조했고, 빛의 속도로 나가야 했거든요. 분명한 건 바른정당은 옛날 군사 독재세력인데, 적폐세력과는 함께 갈 수 없다는 확실한 생각이 있었어요. 민주화를 부정했던 세력과 어떻게 같이 갈 수 있겠습니까. 민주당은 패권 세력이에요. '친문' 외에 '비문'은 설 자리가 없잖아요. 우리 민주평화당이 제대로 서야 하고 국민의 호응을 받아야 하는 정당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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