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댓트립-3.1운동 100주년②] 유관순 생가·김원봉 집터…열사가 탄생한 그 곳

입력 2019-03-2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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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공사, 3월 가볼 만한 곳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의 삶을 더듬어보면 어떨까. 충남 천안시에는 독립기념관과 유관순 열사 생가가 있고, 경남 밀양시에는 약간 김원봉이 태어난 집터에 세워진 의열기념관이 있다. 뜨겁게 살다 간 근현대 위인을 생각하며 걷다 보면, 무뎌진 마음에 열정이 피어오를지 모른다.

◇그날의 함성의 되새기며, 독립기념관 =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이 봄, 아이들 손잡고 충남 천안으로 떠나보자. 감동과 교훈이 함께하는 여행이다. 천안에는 독립운동의 함성과 결의, 일제강점기의 고통을 되새겨볼 만한 곳이 여럿 있다.

▲독립을 위해 애쓴 선열들을 만날 수 있는 독립기념관.(사진제공=이하 한국관광공사)

먼저 목성읍 흑성산 아래 들어선 독립기념관으로 가자. 독립기념관이 탄생한 계기는 1982년 일본 고교 역사 교과서 검정 당시, 문부성이 한국에 관련된 내용을 일본 측에 유리하게 수정한 역사 왜곡 때문이다.

1982년 8월 28일에 독립기념관 건립 계획을 발표했는데, 이날은 국권 피탈 72년 하루 전날이다. 이후 기념관 건립을 위한 모금 운동 결과 500억 원이 모였다. 우여곡절도 있었다. 1986년 8월 15일 개관 예정이었지만, 열흘 남짓 앞두고 화재가 난 것. 결국 이듬해 8월 15일 개관했다.

▲독립기념관 겨레의탑.

독립기념관은 이름 그대로 무수한 외침을 극복하고 자주 독립을 지켜온 우리 민족의 국난 극복사를 살펴보고, 겨레의 독립 의지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가장 먼저 ‘겨레의탑’을 만난다. 높이 51m로, 고개를 힘껏 젖혀야 꼭대기를 바라볼 수 있을 정도다. 주차장에 설 때부터 방문객을 압도하는 위용을 자랑한다.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겨레의집.

겨레의탑을 지나면 또 한 번 놀란다. 방문객 앞에 버티고 선 ‘겨레의집’은 웅장함 자체다. 길이 126m, 너비 68m, 높이 45m에 달하는 동양 최대 기와집이다. 수덕사 대웅전을 본떠 설계했으며, 기념홀 같은 역할을 한다. 기와는 구리로 제작했으며, 현판은 서예가 일중 김충현이 썼다.

▲태극기 한마당.

겨레의집 내부에는 ‘불굴의 한국인상’이라는 조각상이 있다. 한 무리 사람들이 힘찬 동작으로 앞을 향해 나아가는 형상이다. 온몸을 바쳐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연 순국선열을 상징한다. 겨레의집 앞으로 태극기 815기를 연중 게양하는 ‘태극기한마당’이 펼쳐진다. 2005년 광복 60주년 기념으로 조성했다.

▲불굴의 한국인상.

독립기념관은 7개 전시관과 입체영상관으로 구성된다. 자료가 워낙 방대하고 전시관이 넓어 꼼꼼히 둘러보려면 5시간 정도 걸린다. 미리 정보를 알고 동선을 짜서 가는 것이 좋다. 7개 전시관에서는 일제의 잔인한 침략상과 각지에서 펼쳐진 독립운동을 시기별로 살펴볼 수 있다. 다양한 문헌 자료와 미니어처, 영상물이 이해를 돕는다.

제1전시관은 선사시대부터 조선 후기인 1860년 이전까지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과 외세 극복의 역사를 정리한다. 제2전시관은 개항기와 일제강점기(1860년부터 1940년대까지) 우리 민족의 시련을 살펴볼 수 있고, 제3전시관은 일제에 항거한 의병 전쟁과 안중근 의사의 의거 등 구한말 국권 회복 운동에 관한 자료를 전시한다. 제4전시관은 독립운동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공간으로, 다양한 시각 자료가 감성을 자극한다.

▲을사늑약을 재현한 모형.

국외에서 활동한 독립군과 광복군의 흔적이 있는 제5전시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의 밀랍 모형이 눈길을 끄는 제6전시관, 관람객이 독립 만세를 불러보는 등 국내외에서 전개된 다양한 독립운동을 체험할 수 있도록 꾸민 제7전시관도 발길을 붙든다.

▲한국광복군에 관한 전시물.

독립기념관은 주변에 숲과 호수가 어우러지고 캠핑 공간과 꼬마열차, 어린이방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한나절 가족 소풍지로 손색이 없다. 첨단 디지털 시스템으로 화려한 영상과 특수효과를 체험하는 입체영상관은 아이들에게 인기다. 홈페이지에서 전시관 해설 신청도 가능하다.

◇3ㆍ1운동 도화선 ‘아우내장터’…유관순 그리고 만세 = 독립 만세 운동이 전국으로 번지는 도화선이 된 것이 ‘아우내장터 만세 운동’이다. 아우내를 한자로 쓴 지명이 병천(竝川)이다. 1902년 병천면 용두리에서 태어난 유관순 열사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1학년에 진학한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다. 3월 10일 전국에 휴교령이 떨어지자, 열사는 같은 학교에 다니던 사촌 언니 유예도와 고향 천안으로 내려와 만세 운동을 주도한다. 이것이 4월 1일 일어난 아우내장터 만세 운동이다. 당시 3000여 명이 모였다고 한다.

▲유관순 열사 영정.

아우내장터 만세 운동으로 유관순 열사의 부모가 죽고, 자신도 체포되어 3년 형이 선고된다. 재판 당시 “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대일본제국 신민으로 살아갈 것을 맹세하겠는가?”라는 재판장의 질문에 유 열사는 “나는 왜놈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언젠가 네놈들은 천벌을 받아 반드시 망할 것이다”라며 재판장에게 의자를 던졌다.

옥중에서도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열사는 이듬해 4월 이왕세자(영친왕)가 도쿄(東京)에서 결혼하는 것을 기념해 1년 6개월로 감형됐지만, 1920년 9월 28일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한다.

▲유관순 열사 생가는 만세 운동 당시 전소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유관순 열사 생가는 아우내장터 만세 운동 당시 일본 관헌이 가옥과 헛간을 불태워 빈터만 남은 것을 1991년 12월 30일 복원했으며, 봉화 터와 함께 사적 230호로 지정됐다. 생가 옆에는 박화성이 시를 짓고 이철경이 글씨를 쓴 기념비가 세워졌고, 열사가 다닌 매봉교회가 있다.

생가에서 유관순 열사 사적지까지 10여 분이면 걸어갈 수 있으며, 열사의 영정이 모셔진 추모각과 동상, 기념관 등이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린다. 유관순 열사가 만세 운동을 펼친 아우내장터 일대는 지금 병천순대거리가 조성됐다.

▲유관순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

◇학생 김원봉, 의열단 만들다 =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2015년 개봉한 영화 ‘암살’에서 약산 김원봉이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를 찾으며 한 말이다. 이 영화에 1200만 명이 넘는 관객이 들면서 약산 김원봉과 의열단,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밀양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밀양 만세운동 벽화.

그리고 지난해 약산이 태어난 집터에 의열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단정하고 아담한 건물로 들어가면 김원봉을 소개하는 글과 함께 ‘의열 투쟁’의 주요 연표가 보인다. 이어지는 대형 스크린에는 약산과 의열단의 항일 독립투쟁 관련 영상이 펼쳐진다.

조선의용대 시절 약산이 연설하는 영상도 있다. 학생 때부터 웅변으로 대중을 휘어잡았다는 약산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형형한 눈빛은 지금도 듣는 이의 마음을 뜨겁게 한다.

▲조선의용대 시절 김원봉의 연설 장면.

1898년 경남 밀양군 부북면 감천리 57번지(현재 밀양시 노상하1길 25-12)에서 태어난 김원봉은 어린 시절부터 항일 독립의식이 투철했다. 보통학교(초등학교)에 다닐 때 일본 왕의 생일 축하 행사를 위해 나눠준 일장기를 화장실에 처박았을 정도. 학교가 발칵 뒤집혔고, 김원봉은 자퇴했다.

▲조선의용대 창립기념 사진.

이 일을 함께한 인물이 이웃에 사는 동생 윤세주다. 두 사람은 뒷날 함께 의열단을 만들면서 항일 독립운동의 동지가 된다. 의열기념관 바로 옆 공터가 윤세주의 생가 터다. 지금 이곳에는 미처 해방을 보지 못하고 일제와 전투 중에 눈감은 윤세주 열사를 기념하는 비석이 있다.

보통학교를 자퇴한 약산과 윤세주는 몇 년 뒤 밀양의 동화학교에 입학했다. 충의를 목숨처럼 여기는 선비의 고장 밀양에서는 일찍이 민족 교육에 힘썼다. 그 중심에 동화학교가 있었다. 밀양이 독립운동의 요람이 된 것도 이런 교육의 영향이 컸다.

▲의열기념관 옥상에서 바라본 윤세주 생가터.

마침내 독립운동에 투신할 뜻을 세운 약산은 중국으로 떠나, 당시 항일 무장투쟁을 주도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다. 밀양에 남아 만세 운동을 주도한 윤세주는 일제의 검거를 피해 약산을 찾아갔다. 그해 11월 만주 지린(吉林)에서 조선 청년 10여 명은 ‘천하의 의로운 일을 열렬히 실행’하기로 맹세했다. 이름만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의열단의 탄생이다. 의열기념관 2층에는 이들이 모여 의열단을 결성한 ‘반씨 주택’을 재현한 공간이 있다.

▲의열단이 태어난 중국 길림 반씨 주택 재현 공간.

의열단은 식민 지배자와 민족 반역자 처단,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식민지배 기관 파괴에 집중했다. 정규 병력으로 맞설 수 없는 일제에 대항해 무력 투쟁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이를 위해 의열단원 최수봉이 밀양경찰서를 폭파하고, 김익상과 이종암 등이 상하이(上海)에서 일본 육군대장을 저격하고,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졌다.

이 모든 투쟁의 배후에 의열단장 김원봉이 있었다. 약산의 아내 박차정도 항일 투쟁에 앞장선 독립운동가다.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 옥고를 치르고 의열단원인 오빠의 도움으로 망명, 의열단에 가입하고 김원봉과 결혼했다. 박차정은 항일운동을 계속했으나, 안타깝게도 해방 1년을 남기고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의열기념관 2층에서 박차정의 독립운동 활동을 자세히 소개한다.

▲약산 김원봉과 아내 박차정.

◇곳곳이 항일운동 성지 ‘밀양’ = 의열기념관에서 500m쯤 떨어진 밀양 관아지는 1919년 3월 13일, 밀양 최초로 만세 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고종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경성(서울)으로 간 윤세주는 탑골공원에서 벌어진 3·1운동에 참여하고 돌아와, 19세에 밀양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여기에는 김원봉과 윤세주의 스승이자 동화학교 교장을 지낸 전홍표의 도움이 컸다.

▲3.13 밀양 만세운동이 벌어진 밀양 관아터.

함께 경성에 간 윤치형 등과 거사를 준비한 윤세주는 밀양 장날인 3월 13일에 태극기 수백 장을 나눠주며 만세 운동을 일으켰다. 당시 이곳에는 밀양군청 건물이 있었고, 바로 앞이 밀양시장이라 많은 사람이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현재의 관아 건물은 모두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만세 운동을 주도한 윤세주와 윤치형은 일제의 검거를 피해 만주로 망명, 의열단원이 되어 평생 항일 독립운동에 매진한다.

▲영남루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밀양 영남루(보물 147호)도 항일 독립운동과 연결된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건축물인 영남루에는 현판과 시문이 많은데, 이 중에 김원봉이 입학한 만주의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의 집안 아저씨인 귤산 이유원의 글씨가 있다.

밀양의 독립운동 역사를 자세히 보고 싶다면 밀양독립운동기념관으로 가자. 건물 마당에는 김원봉과 윤세주를 포함한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36명의 흉상이 관람객을 맞는다. 안으로 들어가면 밀양 만세 운동의 풍경이 생생한 디오라마로 펼쳐진다. 밀양에서는 3·13 만세 운동을 필두로 8차례 만세 시위가 있었다. 여기에는 계급과 이념, 종교를 초월해 수많은 사람이 참여했다.

▲밀양독립운동기념관 입구의 밀양 만세운동 디오라마.

이어지는 전시실에는 의열단에서 시작한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의 활동이 자세히 소개된다. 김원봉이 세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졸업생 중에는 시인 이육사의 이름도 보인다.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으로 이어지는 김원봉의 활동, 동맹휴업과 노동쟁의, 사회운동으로 일제에 저항한 밀양 사람들의 투쟁도 살펴볼 수 있다.

▲윤세주 초상과 밀양 독립운동가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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