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자 의결권행사지침) 시행에 맞춰 단기매매를 줄이고 투자를 장기화하려면 정책 환경의 변화가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각계 전문가들은 올해 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가 미비점을 드러낸 만큼, 일관된 지침의 객관성과 독립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데 입을 모았다.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스튜어드십코드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토론회가 열렸다. 2019년 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의 한계를 진단하고 개선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취지다.
이 자리에서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이사는 “기업가치 제고를 위한 장기적 대안을 제시하고 우호적 대화를 원칙으로 하는 스튜어드십코드를 통한 주주권 행사는, 단기 투자수익만을 극대화하는 전통적·적대적 주주행동주의와 다르다”고 전제했다.
장기투자 유도 방안으로는 △공적연금의 위탁운용사 성과평가 대상기간 장기화 △금융감독원의 예탁자산 회전율수준 평가 도입 △금융상품 수수료체계 개편 등을 제시했다.
류 대표는 “적극적 주주권 행사를 제약하는 현행 자본시장법상 5%룰 및 경영참여에 대한 과도한 확대해석을 완화해야 한다”며 “의결권자문업 인가와 관련한 독립성과 전문성 요건을 엄격히 해 스튜어드십코드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담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의당 윤소하 의원은 “최근 5년간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 내역을 보면 2014년 찬성 90.77%, 반대 9.05%에서 2018년 11월까지 찬성 80.55%, 반대 18.92%로 반대가 2배 늘었다”면서 “거수기라는 조롱을 받았던 찬성 일변도의 의결권 행사에서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윤 의원은 “근본적으로 국민연금은 장기투자자이기 때문에 단기매매는 최소화해야 한다”며 “특히 위탁운용이 문제인데, 목표 수익률을 달성하기 위해 단기매매를 많이 하고 있다. 위탁운용사들의 불필요한 단타매매를 줄일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남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부회장은 “주주혁명이나 연금사회주의 등 과도한 의미부여나 우려, 색깔론 스타일의 이념적 비판을 가하려는 행위는 스튜어드십코드의 정상적인 모습을 안착시키려는 노력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 변호사는 “지배구조 개선에 노력하지 않는 투자대상 기업에 대해서는 먼저 그 명단을 공개해 지배구조 개선에 노력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면서 “다른 기관투자자들도 지배구조 개선 요구에 나서도록 비공개 대화에서 지배구조 개선이 이뤄지지 않은 이유 등을 밝혀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어 “지배구조 개선 노력을 하지 않는 투자대상 기업에 대해 2020년 3월 주총에서 이사선임, 이사해임, 정관변경 등에 대한 안건을 상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주주제안을 하려면 적어도 2월에는 주주제안을 해야 한다”며 “그 전에 자발적인 지배구조 개선 노력을 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명단공개(Focus Listing)를 적어도 2019년 하반기에는 해야 할 것”이라고 부연했다.
더불어민주당 정춘숙 의원은 “최근 대표적인 스튜어드십코드 행사로 꼽히는 대한항공에 대한 주주권 행사 방향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가상의 단기매매차익 반환 추정치가 과도하게 계산되는 오류가 발생하는 등 운영상 미흡한 점이 노출돼 국민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고 언급했다.
정 의원은 “스튜어드십코드 도입 이후 전문위원회의 역할이 상당히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주주총회 집중기간인 3월과 4월 중 해당 기업의 주총일자 2~3일 전에 전문위원회가 개최돼 충분한 자료 검토와 논의가 이뤄지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2019년 주주총회에서 여전히 무원칙한 주주권 행사로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이지 못함을 스스로 입증했다”고 평했다.
박 교수는 “국민연금은 정치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핑계로 주주권 행사에 소극적이었으나, 이런 부작위가 오히려 연금가입자의 이익 대신에 재벌 총수일가의 이익을 위해 국민연금을 악용하고 정관경 유착을 조장하는 방편이 돼왔다”며 “대표적인 사례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당시 국민연금이 수탁자로서 충실의무를 다하지 않고, 오히려 투자대상이자 감시대상인 삼성그룹의 총수일가 이해에 충실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연금가입자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힌 사건을 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금융위원회는 내부자의 단기매매차익 반환에 관한 이른바 10%룰 적용에 대한 유권해석을 변경할 필요가 있다”면서 “국민연금이 채택한 스튜어드십코드와 동일하거나 더 강화된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하는 금융사들만이 국민연금 기금을 위탁 운영하도록 해야 한다. 이를 통해 재벌의 계열사인 보험사 등의 금융기관들도 소속 재벌이나 총수일가와의 이해상충을 방지하는 원칙을 준수하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바른미래당 채이배 의원은 “스튜어드십코드가 도입된 이후 첫 정기 주주총회였지만 많은 회사에서 거수기인사와 낙하산인사 등을 사외이사로 선임함으로써 대주주와 경영진의 독단적인 경영을 막고 이사회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확보하기에는 미흡했다”고 평가했다.
채 의원은 “이번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과정을 살펴보면 기업가치훼손 내지 주주권익침해의 이력이 있는 현정은 회장의 현대엘리베이터 정기 주주총회에 기권 투표를 결정하는 등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는 지침을 위반했다”면서 “국회는 앞으로 스튜어드십 코드가 제대로 정착하고, 제 역할을 해나갈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날 회의는 윤소하ㆍ정춘숙ㆍ채이배 의원실과 경제개혁연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민변 민생경제위원회,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가 공동 주최했다. 토론회는 김우찬 고려대 경영대학 교수가 좌장을 맡고 강정민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과 원종현 국민연금연구원 부원장, 최경일 보건복지부 국민연금재정과 과장 등이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