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경기 냉각속도 너무 빨라…최저임금 인상·주52시간 근무 ‘소주성’이 부채질
서울 논현동 건설회관에서 만난 이상호 한국건설산업연구원장은 서울 아파트값이 하락장을 멈추고 곧 반등할 것이란 ‘바닥론’에 대해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계단식 하락’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이상호 원장은 “과잉공급된 지방이나 일부 수도권은 집값 하락이 가시화되고 있지만 서울, 특히 강남의 주요 지역 아파트는 아직도 크게 하락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일부 급매물 소진 뒤 수요자와 매도자 간의 줄다리기가 팽팽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현재 아파트값 장세가 계단의 발판을 지나는 중이고, 급매물이 등장하면 가격이 이에 맞춰 다시 내려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 원장은 서울 아파트값이 반등하기 어려운 이유로 정부 규제, 거시 경제 악화, 늘어난 공급량을 꼽았다. 특히 ‘바닥론’이 나오면서 부동산 규제 필요성이 부각될수록 정부가 규제 정책을 고수할 가능성이 크다는 설명이다. 이 원장은 “경제성장률 하락은 물론이거니와 설비투자나 건설투자 감소세도 심각하고, 환율까지 치솟고 있다”며 “이 같은 여건에다가 규제까지 있는데 서울 아파트값만 홀로 오르기는 힘들다”고 진단했다.
정부가 집값 안정화 차원에서 실시한 3기 신도시 공급 대책에 대해서 이 원장은 “어느 정책이나 그렇듯 양면성이 있다”며 “긍정적인 측면은 정부도 공급대책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정했다는 점이다”고 평가했다. 이어 “정부는 한때 주택시장 불안의 원인을 투기꾼 탓으로, 과잉수요 탓으로만 돌렸다”며 “이때에 비하면 진일보한 인식의 전환이다”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2기 신도시의 경우 생활인프라 부족으로 고통받는 지역민이 있는데, 더 좋은 입지와 교통대책을 포함한 3기 신도시 계획으로 지역민에 박탈감을 준 부분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원장은 “신도시 문제는 투 트랙으로 해결해야 한다”며 “2기 신도시의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한 확실한 대책 수립과 시행도 있어야 하고, 3기 신도시는 시장 수급상황을 면밀하게 모니터링하면서 적절하게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근 정부와 서울시, 경기도 등 지자체가 공공임대 주택 비중을 늘려가는 시도에 대해서 이 원장은 방향성에서만큼은 동의했다. 우리나라 공공임대가 선진국에 비해 적은 것이 사실이라, 역대 정부에서도 꾸준히 공공임대를 확대해 왔다는 설명이다. 다만, 값싼 분양주택을 선호하는 소비자의 수요도 고려돼야 한다고 했다. 이 원장은 “정부 공급 대책에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수요가 제일 많은 서울 도심 내부 분양주택을 확대하는 방안이 부실하다는 점”이라며 “당장은 어렵더라도, 중장기적으로 서울 내부에서 재개발이나 재건축을 통한 공급확대 정책도 준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가 이끄는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은 최근 ‘건설 및 주택경기 긴급 진단’이란 보고서를 내고 건설경기 급랭(急冷) 현상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를 냈다. 최근 건설 경기 하락 속도가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이후 가장 빠르다는 주장이다.
보고서를 낸 배경에 대해 이 원장은 “과거 통계를 보면 건설투자가 정점에 도달했다가 마이너스로 전환하는 데 2년 반 정도가 소요됐는데, 이번에는 그 시기가 1년밖에 걸리지 않았다”며 “지난해부터 위기상황에 대한 신호를 계속 보냈었는데, 때마침 1분기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전환됨에 따라 건설경기 위축의 심각성도 함께 알려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과거 평균 수치보다 수주, 투자, 취업자 수가 줄었다고 말하긴 어렵고, 문제는 급격한 경기하강 속도에 있다”며 “정부의 부동산시장 규제강화나 민간투자 사업 축소방침도 한몫했지만, 급격한 최저 임금 인상이나 주52시간 근무제 도입과 같은 이른바 소득주도성장 정책도 건설업계 위기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기업가 대신 근로자에 무게를 실어주는 정부의 방향성이 세워지면서 투자를 꺼리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원장은 “최근 2년간 만나본 건설기업인 중에서 사람 더 뽑고 투자를 늘리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 없다”며 “민간 건설업계로서는 향후의 정부 정책방향이 규제강화로 간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투자를 줄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내만이 아니라 글로벌 시장을 보고,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를 보고 정책을 수립할 것을 정부에 주문했다. 이 원장은 “이미 영국, 일본, 싱가포르 등 전 세계 각국은 나름대로 건설산업 혁신정책을 수립해서 시행하고 있다”며 “국내 건설산업에서의 적폐청산도 중요하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노력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근 수주가 급감했다는 뉴스가 쏟아지고 있는 해외 건설 부문에 대해선 “그렇게 비관적으로 볼 일은 아니다”라는 것이 이 원장의 진단이었다. 해외 건설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 원장은 “UAE원전 수주를 계기로 한때 700억 달러를 상회했던 해외건설 수주실적이 최근 몇 년간 300억 달러 수준을 맴돌고 있다”며 “오히려 과거 600억 달러나 700억 달러 수준의 수주실적이야말로 우리의 수행능력을 넘어선 과잉수주였다”고 평가했다. 이 원장은 “과거 GS건설의 사례만 놓고 볼 때, 2011년 무렵 35억 달러 수주이던 해외 수주 잔고가 이듬해 150억 달러 수준으로 늘었다”며 “수행 능력은 그대로인데 과업만 막중하게 늘어난 상태이니 결국 체할 수밖에 없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과거 규모에만 매몰돼 저가 수주에 열 올리던 시절에 비해 현재 수익성 위주의 선별 수주가 훨씬 바람직한 형태라고 이 원장은 판단한다. 이 원장은 “향후 해외 수주실적의 확장 여부는 결국 우리 해외 건설업체의 종합적인 시스템 역량 확보 수준에 따라 좌우될 것”이라며 “금융제공 역량만이 아니라 현지화, 시장정보, 사업관리, 계약 및 클레임관리 등을 포괄한 시스템 역량을 얼마나 갖추느냐가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끝으로 이 원장은 공공건설업계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적정공사비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원장은 “공사비 책정단가가 십수 년에 거쳐 지속적으로 하향조정됐지만 낙찰률은 제자리걸음인 데다가 정부의 각종 규제 강화로 공사원가 부담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며 “공공의 인프라 사업을 민간건설업체가 자금을 추가적으로 투입해서 건설하는 모양새인데, 적정공사비 확보가 이뤄져야 일자리 창출이나 거래 공정화도 가능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