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기 전북대 중문과 교수
우리나라 사람처럼 거울보기를 즐겨하고 또 습관화한 경우가 외국에는 많지 않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처음 온 외국인들은 곳곳에 붙어 있는 거울을 보며 더러 놀라기도 한단다. 오늘날처럼 밝은 거울이 없던 시절에도 우리 민족은 자신을 비춰보기를 좋아하여 맑은 물에라도 얼굴을 비춰보곤 했나 보다. 조선 후기 실학자로 유명한 연암 박지원 선생도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읊은 시가 있다. ‘억선형(憶先兄:먼저 가신 형을 그리며)’이라고도 하고, ‘영계(映溪:시냇물에 내 모습 비춰보며)’라고도 하는 시이다. “내 형의 얼굴과 수염, 누구를 닮았나? 아버지 모습 꼭 닮은 형이기에 아버지가 그리울 때면 형을 바라보곤 하였었는데. 이제는 형의 모습이 그리우니 어디에서 형을 볼 수 있을까? 옷매무새 가다듬고 시냇물에 내 얼굴을 비춰 보네.(我兄顔髮曾誰似, 每億先君看我兄. 今日思兄何處見, 自將巾袂映溪行.)” 가슴을 찡하게 하는 시이다.
만난 사람은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니 인생은 어쩌면 이별의 연속이고, 늘 이별 연습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삶과 죽음으로 나뉘어 영원히 볼 수 없는 이별이라면 그리움을 가슴에 묻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고이 보내드린 죽음이라면 그래도 평화롭게 가슴에 묻을 수 있지만, 억울하게 생명을 빼앗긴 죽음이라면 어떻게 한가슴에 평화롭게 묻을 수 있겠는가? 이웃의 죽음을 애도하고 다시는 억울한 죽음이 없게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윤동주 시인의 시처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에 귀하지 않은 목숨은 어디에도 없다. 누군가에게는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며, 아버지 어머니가 그리울 때면 더욱 보고 싶은 아버지 닮은 형이고, 어머니 닮은 누이인데 귀하지 않은 생명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가정의 달 5월이 가기 전에 그리운 사람을 실컷 그리워하도록 하자!